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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17. 08:00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27

붓꽃 | 배는 잔뜩 부른데 마음이 헛헛한 당신에게 엽서 한 장 띄우고 싶다. 꽃을 피우려 올라오는 봉오리가 먹물을 함빡 머금은 영락없는 붓이다. 참으로 이쁜 우리 말 꽃이름이다. 붓꽃. 금방 어디에라도 글을 써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붓꽃이다. 옛날 옛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님 그리는 마음 참을 수 없을 때 먹을 갈아 뜨거운 가슴 달래며 연서를 띄워 보냈겠지. 사람을 놓아 마음을 보내 놓고, 그러고는 하염없이 기별오기를 기다렸겠지. 볼펜으로 찍찍 연애편지라고 써서 우체통에 넣어버리던 우리들 세대를 “멋대가리 없는 놈들…” 그러셨겠지. 그래도 그때는 큰 가방 메고 골목길 돌아 올 우체부 아저씨 애타게 기다리며 마음 졸이고 가슴 두근거리던 따뜻한 세월들이었지. 나 대학 다닐 때는 우리집에도..

2018. 7. 2. 08:30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25

앵초 | 약간은 탐욕스럽게 보인다. 앵초─. 약간은 탐욕스럽게 보인다. 키 작은 담자리꽃나무들을 제치고 우뚝 선 모습이 조금은 잘난 체 하는 듯 같은 앵초라도 환경에 따라 꽃 모양이 다르다. 동물이나 인간들처럼 꽃들도 뿌리 내리는 토질이나 위치에 따라 조금씩은 다른 모양, 다른 색, 다른 생각일 수도 있다. 꽃들은 동물이나 곤충들처럼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 씨가 떨어지는 자리에 싹을 틔워, 순종하고 적응하며 살아간다. 인간이 부모와 자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서로를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과 서로를 바꿀 수 있는 어려움까지 겹쳐서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힘겨운 삶을 살겠지. 가정법원도 훨씬 더 바빠지겠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내 엄마, 내 아버지. 저 세상으로 나는 내 엄마, 아버지 찾아가리..

2018. 6. 25. 21:38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24

당개지치 | 사람답게 살다가 폼나게 돌아가자. 알껍질을 깨고 잔부리를 내미는 작은새들. 어미 뱃 속에서 갓 나와 아직 태를 매단 채 벌떡 일어서 첫 세상을 내딛는 짐승들. 그런 경이로운 탄생의 신비는 동물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이 숨막히는 순간들. 벌레들이 허물을 벗는 모습 또한 경이롭다. 꽃들이 피어나는 모양 또한 그에 못지 않다. 다만 그 진행과정이 조금 느리기에 우리가 쉽게 보고 느낄 수 없을 뿐이다. 어미의 뱃속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대지가 있어 어미의 탯줄보다 치열하고 강인한 뿌리가 있어 동물들의 탄생보다 더욱 더 찬란하게 꽃들은 피어난다. 왜지치는 피어난다. 우리 사는 이 세상, 얼마나 지혜롭고 장한가. 우리 아기들이 첫울음을 터트리며 태어나는 그 순간들은 또 ..

2018. 6. 19. 08:46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23

놋젓가락나물 | 저명하신 사진작가 선생님들 혹시 5254라는 숫자를 아시나요? “나 이제 산악사진 그만 두고 꽃사진하게 될지 모른다.” 그랬더니 어떤 놈이 “꽃도 찍고, 산도 찍으면 안 되냐?” 그런다. 누드 찍어 몇 점 따고, 풍경 찍어 또 얼마 보태고 접사 한 장 해서 몇 점 추가, 걸레처럼 주워 모아 무슨 사진작가협회인가 뭔가의 회원이라고 지가 예술가 라도 된 걸로 착각 속에 빠져 있는 놈. 외국어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놈. 예술이 뭐냐고 한국말로 물어도 벙어리가 되는 놈. 그놈이 산도 꽃도 찍으랜다, 나더러. 곰탕, 짜장면, 초밥을 같은 식당에서 한다면 어느 게 제대로 되겠는가? 사진은 더 하다. 산에 가면 꽃이 있으니까 두 가지 다 할 수 있다? 아니다. 피사체를 대하는 마음도 장비도 다르..

2018. 6. 12. 10:18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22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22 사진, 글 : 안승일 며느리밑씻개/메뚜기 | 가느다란 며느리밑씻개. 그들의 몸부림이 흔들흔들. 풀섶에는 어느 곳에나 질서가 있다. 벌레들에게는 엄하게 지켜지는 도덕과 도리가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러브호텔도 불륜도 없다. 애증도 갈등도 필요 이상의 성욕도 없다. 인간들은 폐경 후나 임신중에도 그 짓을 하면서 배란기가 아니면 짝을 짓지 않는 그들은 하등동물이고 자기들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뻔뻔스럽고 어이없는 착각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벌레들의 그 사랑의 행위는 성스럽고 치열하다. 종족 번식을 위한 단순 행동으로만 보면 안 된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를 찾는 데 까다롭다, 어렵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짝을 짓지 않는다. 상대가 정해진 후에 치러지는 사랑의 의식을 몰래몰래 가만가..

2018. 6. 4. 20:43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21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21 사진, 글 : 안승일 땃딸기 꽃 | 그 신비한 땃딸기는 두번 다시 볼 수가 없었다. 십 년 전쯤이다. 고산화원 서쪽 해발 2000m 가까운 수목한계선에서 앙증맞게 익어가는 땃딸기를 처음 만났다. 칠월 중순쯤이었는데 꽃도 피어 있고 딸기도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엄지손톱만한 열매가 땅에 앉지 않고 곧추 서서 꿈처럼 바람에 딸랑대고 있었다. 아주 진한 향을 내뿜고 매달려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신기한 딸기가 있다니. 내가 손 대기에 죄스러울 만큼 향기로웠다. 그 뒤로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 향을 잊지 못해 다시 찾아보지만 꽃은 피는데 그 신비한 땃딸기는 잘 여물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열매의 맛도 내가 찍었던 사진도 모두가 꿈 속에서의 일인 듯한 생각도 들었다. 꿈..

2018. 5. 28. 08:30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20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20 사진, 글 : 안승일 동자꽃 | 동자승의 무덤에서 피어난 꽃. 자세히 보면 꽃잎은 열 장이 아니라 다섯 장이다. 꽃가게 화분에 심어져 팔려 가기를 기다리는 놈은 가짜 동자다. 땡중이다.

2018. 5. 21. 19:39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19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19 사진, 글 : 안승일 달구지풀 | 제주달구지풀과 비슷하다. 구별이 잘 안 된다. 별 총총. 하늘에 별이 너무 많다. 하늘보다 별이 더 많다. 아주 많다. 이런 날씨면 내일은 사진 안 찍을 꺼 같다. 꽃도 천지도 빛이 너무 강하면 재미없다. 사진의 부드러움은 사라진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도 사진 만들기 어렵다. 사진은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다. 비가 와서, 너무 흐려서 , 너무 맑아서, 그래서 사진 못 하면 언제 사진 찍나? 숲 속에 빛나는 달구지풀의 유혹. 그래서 얇은 천으로 그늘 드리워 광선을 조금 부드럽게 만들었다. 20여 년 광고사진을 하며 터득한 잔재주다. 광고사진 하며 맘과 몸에 밴 사진 잘못찍으면 죽는다는 프로정신. 나는 사진외인부대라는 자부심. 6-7월에 ..

2018. 5. 14. 10:51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18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18 사진, 글 : 안승일 두메분취 | CONTAX 6×4.5 Macro Planar 120mm F5.6 AV Kodak E100vs 찍어놓은 필름이 몇만 장이다. 무엇이 더 부러울 게 있는가. 내 서재에 사진책 천여 권이다. 무엇이 더 부러울 게 있는가. 내게 필요한 사진기 모두 다 있다. 무엇이 더 부러울 게 있는가. 내 코란도로 어디라도 갈 수 있다. 무엇이 더 부러울 게 있는가. 내 전시장 지을 천여 평 땅도 있다. 무엇이 더 부러울 게 있는가. 한창 일할 나이에 맑은 꿈도 있다. 무엇이 더 부러울 게 있는가. 춥고 배고픈 줄 알고 시작했던 사진. 그런데 이제는 가진 게 너무 많다. 욕심은 버리자. 고산화원을 뛰어다닐 때에도 사진을 꼭 찍어야 한다는 억눌림에서 벗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