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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21. 20:08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54

분홍할미꽃 | 허리도 굽었지만 열매에 달린 털이 백발이다. 중국명 백두옹. 백두산 원경사진 한번 찍겠다고 송강하에서 만장 가는 길녘 금강촌. 蘇玉和네 집에 방을 얻어 살았다. 소 동무는 소학교 동창인 색시하고 열아홉 살 먹은 아들 하나 두고 날마다 허허 웃으며 재미나게 산다. 남편은 색시를 위해 날마다 숯을 굽고 색시는 남편을 위해 날마다 뜨개질을 한다. 저녁이면 동네사람 두셋씩 마실 온다. 외국사람 처음 본다고 구경하러 온다. 모여 와서는 이래 저래 나를 웃긴다. 나도 서툰 중국말로 그들을 웃겨준다. 손님 대접한다고 커피 내놓으면 중약같다고 깜짝 놀라 손을 휘휘 젓는다. 집주인 소 동무네 세 식구와 송강하 가서 맛있는 거도 먹고 함께 목욕도 하러 간다. 어떤 때는 사진 하는 일보다 순박한 그들과 어울리..

2019. 1. 14. 19:55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53

바위솔 | 솔방을을 닮아서 바위솔. 바위 틈에 살아서 바위솔. 나는 돌밭이나 바위 틈에 뿌리를 박고 강인하게 피어나는 꽃들을 만나면 무조건 좋아한다. 무조건 존경한다. 지독한 태양열에 달궈진 암벽의 복사열과 계속되는 가뭄의 극단적인 갈증을 참고 모질게 불어대는 미친바람도 견디고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극한 상황을 극복해내는 그 여린듯 강한 생명들. 그들에게 우리 모두 기립박수를 보내자. 그들의 삶을 한번쯤 생각해보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느라 바위 틈의 악조건에서 열심히 물과 양분을 만들어 보내는 뿌리들, 숨은 일꾼들. 우리 사는 세상에도 그런 이들은 있다. 자기를 내세우려 하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어려운 일을 해내는 아름다운 사람들. 진정으로 기립박수를 받아야 할 그들이다. 누가 꽃이 되..

2019. 1. 8. 13:27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52

패모 | 그 스튜디오도 모두 백두산 작업에 털어넣었다. 그러길 참 잘했다. 서발막대 휘둘러도 걸칠 데가 없어라. 아무리 더듬거려도 의지할 데가 없어라. - 패모 쓰러지면 기어가고 열심히 더 가다보면 덩굴손이 붙들 데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 패모 그래서 더 힘차게 자라 이쁘게 꽃 피우고 주렁진 열매는 더 탐스럽게 영글 것이다. - 패모 학연도 지연도 가진 돈도 없이 맨손으로 충무로에다 광고사진 스튜디오를 열었다. - 나 망하면 죽을테니까 산에도 집에도 가지 않고 스튜디오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고 일했다. - 나 사진을 직업으로 한다는 언제나 황홀했던 자신감은 거기에 젊음도 꿈도 사랑도 모두 걸었다. - 나 애타게 팔을 휘젖는 젊은 패모를 사진찍으며 어려웠지만 신나던 시절의 나를 생각했다. 아마도 그때 누..

2019. 1. 3. 10:19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51

연영초 | 당신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요? 마음이 흐트러지면 바늘땀도 비뚤어진다고 했다. 사진도 그렇다. 셔터를 누를 때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다. 사진이 될 만한 꽃을 찾아 숲을 헤매다가 마음에 드는 꽃 한 송이라도 만나면 말을 건넨다. “당신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요?” 우리는 서로 외로움을 타기 때문이다. 잎이 넓고 꽃조차 우아한 연영초, 지독한 화장품 냄새를 피우지 않는 참한 얼굴. 전혀 꾸미거나 장식을 하지 않아 단아한 여인이 두 팔을 벌려 나를 맞아주는듯 하다. 그녀와의 첫번째 눈맞춤. 촬영이 끝나면 우리는 훨씬 더 친해져 있을 것이다. 연지 안 바른 당신 그 입술에 입맞추고 싶다. 나 어릴 적에 어른들이 그러셨다. 루즈를 진하게 바르면 “쥐 잡아먹었냐?”구.

2018. 12. 24. 21:23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50

족도리풀 | 족도리풀이 스무 가지쯤 되는데 네 이름은 뭐니? 너는 무슨 족도리냐? 족도리풀. 넓은 잎 아래 숨은 듯 피어난다. 땅색의 꽃이 땅에 없는 듯 피어난다. 중국말로는 세신이라 하고 뿌리는 가래를 없애주고 두통 치료에도 쓰인다. 사진을 찍으려면 코를 땅에 박아야 한다. 불룩나온 배를 땅에 찰싹 붙여야 한다. 그럴 때면 언제나 땅냄새를 맡는다. 부드러운 흙의 숨소리를 듣는다. 나, 일 모두 끝내고 떠나면 아직 쓸모 있는 내 몸뚱아리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나머지 껍데기는 불태워 재로 만들어서 향기로운 흙 속에 스며들겠지. 흙과 함께 숨쉬러 흙으로 돌아가겠지. 화인다 들여다보다 힘들고 지칠 때 내가 돌아갈 포근한 땅에 뺨 부벼 본다. 大地의 부드러움과 향이 온몸으로 스며든다.

2018. 12. 18. 07:52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49

흰술패랭이 | 우리말 사랑은 이오덕 선생님이 세종대왕보다…. 흰술패랭이, 우리말 이름. 세월이 흘러 이제는 한자말 쓰면 무식한 놈이다. 중매쟁이는 커플매니저라 해야 좋아라 하고 미용사 이발사는 어느새 헤어디자이너가 되었다. 분장사는 또 메이크업 아티스트된지 오래다. 식당은 싸구려 음식 먹는 데고 레스토랑은… 촌구석애도 예식장은 망하고 웨딩홀만 흥한다. 사진쟁이는 자칭 포토그래퍼가 된 놈들도 있다. 정신나간 허깨비들은 전국민이 영어를 해야 빠다를 얻어 먹고 살 수 있다고 헷소리를 해댄다.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갓난쟁이 햇아에게까지 영어를 하라고 울부짓는 불쌍한 에미도 있다. 초등학교 입학식을 영어로만 치루었다는 얼도 빠지고 씰개도 빠진 마구잡이 학교도 있다. 미국의 52번째 코리아주가 되기를 속으로 절실..

2018. 12. 9. 19:34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48

얼레지 | 피어나려 할 때가 희망이다. 우리들 인간도 그렇다. 아주 오래 전에 사진을 배운다고 찾아온 어떤 놈이 있었다. 짐을 잔뜩 지워 산에 데리고 가서 텐트 치게 하고 물 떠오고 밥 시키고 며칠 그냥 그렇게 살다가 내려왔다. “선상님, 왜 사진을 안 찍습니까?” “야, 이눔아. 찍을 게 있어야 찍지.” 다음번에도 산에 가서 또 그랬다. 산에 사는 게 재미가 없고 힘들었던지 몇번 그러다 그냥 그놈은 가버렸다. 그의 서두르는 마음으로는 제대로 사진을 할 수 없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진을 배우는 데 평생을 바칠 수 있는 그런 人間이 못 될듯 했다. 먼저 산을 알고, 꽃을 알고, 빛을 알고 왜 사진을 하는가도 알고 난 후에 카메라를 알고 필름을 넣어야 하는데 그의 운명은 산도 사진도 아닌듯 조급해 하다가 ..

2018. 12. 4. 10:45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47

월귤 | GPS GUIDE 1844m N41′ 55 55.5″ E128′ 04 47.1″ 거기에 산다. 나의 길앞잡이 GPS. 두 개의 작은 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찾는 꽃이 있는 데까지 나를 데려다준다. 월귤 하얀 꽃이 어쩌면 이렇게 탐스러울까 가을에 빨강 열매들 보러 어떻게 다시 찾아오나? 숲속에 개불알꽃이 무더기로 시들어버렸는데 내년 봄에 이 참나무숲을 어떻게 헤매나? 그냥 지나다 만나면 찍고 없으면 안 찍고 사진은 그렇게, 되는대로 하는 게 아니다. 사진은 과학이고 기획이며 계획이다. 그래서 GPS는 이제 렌즈만큼이나 중요하다. 수림한계선을 넘으면 목표물은 아무것도 없다. 안개가 짙어지고 바람이 거세게 몰려오면 낯익은 우리캠프로 다시 돌아가기도 어렵다. 만주벌판의 숲속길은 거미줄과도 비교..

2018. 11. 27. 10:11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46

괭이눈 | 꽃받침조차 노란색이어서 꽃잎으로 착각할 수 있다. 산 아래는 벌써 신록이 무성한 유월 중순. 산 위에는 아직 여기저기 잔설이 남아있다. 겨울 내내 바람에 날리워 골 깊이 모인 시커먼 눈덩이들은 8월까지도 안 녹는다. 그 두터운 눈덩이를 녹여내는 것은 지열이며 바람이며 빗물이며 햇볕이다. 그 모두들이 힘을 모아 봄을 만들어 간다. 백두산의 괭이눈은 유월 하순부터 잔설에서 흐르는 찬물을 먹고 핀다. 그들은 습기를 좋아하는 꽃인가 보다. 그런데 어떤 때는 바위 틈이나 화산재의 극도로 건조한 거품돌 사이에서도 씩씩하다.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리를 이룬다. 고산화원의 괭이눈은 잎조차 노랗다. 그래서 잎까지 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마이크로렌즈로 자세히 들여다 보면 네 장의 꽃잎이 고양이의 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