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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20. 10:34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45

물싸리 |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꽃들, 나무들. 오늘은 하루에 사진을 두 장이나 찍었다. 그러니 술 한 잔 안 할 수가 있겠는가. 십년지기 류궈차이 동무도 덩달아 신나서 나에게 배운 김치찌개를 한냄비 끓였다. 중국사람이 끓인 한국식 김치찌개가 고맙고 너무 맛있어 고향생각하며 또 한 잔 했다. 새벽 두 시쯤 차로 장백현을 출발해서 압록강을 거슬러 천지로 오르는데, 강변 물안개가 고산화원으로 넘쳐난다. 이제 마악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고원의 나무들을 감싸고 흐르는 깊이 모를 안개들. 삼각대도 못 펴고 서둘러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수없이 많은 보석들로 장식된 물싸리꽃을 찍을 수 있게 안개가 걷히면서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하루에 사진을 두 장이나 찍어 신나는 날. 그래서 독한 중국술 ..

2018. 11. 13. 10:54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44

덩굴개별꽃 | 우리들 이름 앞에 왜 개(?)를 붙였냐고 어린 별 둘이서 궁시렁궁시렁. 떠둘이 큰별하고 붙박이 작은별하고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가. 이마를 맞대고 소곤소곤 잠도 안 자고 어느 별은 혼자서 궁시렁 궁시렁 시샘하는지 혼자라서 외로운지 궁시렁 궁시렁. 떠돌이별은 이제 곧 떠나버린다는 걸 알고나 그러는 건지. 어떤 날 밤에는 저 넓은 별나라에 야단법석을 차렸는지 모든 별들이 모여들어 한꺼번에 와글와글 시끌벅적 소란스럽기도 하다. 반짝반짝 별들을 닮아서 별꽃, 큰별꽃, 작은별꽃. 나팔꽃도 민들레도 저물녘이면 일찍 잠드는데 온밤을 잠 안 자고 반짝반짝 그래서 별꽃들. 백두산 밤하늘은 유난스레 까맣다. 덕분에 별들은 더욱 더 투명하고 영롱하게 빛난다. 나도 넋놓고 밤새워 별바라기 하다보면 별처럼 별이..

2018. 11. 5. 21:35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43

죽대아재비 | 식물원의 꽃들은 이미 야생화도 들꽃도 아니다. 초원을 달리는 화려한 꿈을 저버린 놈. 사랑을 찾아 달밤을 울어짖는 낭만도 잃은 그놈은 이미 늑대이기를, 승냥이이기를 포기한 놈. 철창 안에서 이름표를 달고 사료나 축내는 야성을 버린 그놈은 이미 호랑이가 아니다. 껍질만, 무늬만 호랑이다. 그렇듯. 식물원의 꽃들은 벌써 야생화가 아니다. 인간에게 보호되면 야생은 사라지고 만다. 재배되고 있는 꽃들은 꿈을 잃은 슬픔이다. 절벽에 매달려 바람에 시달리며 끈질기게 피워낸 그 꽃들은 색깔조차 다르다. 당신이 진정한 야생화 사진을 하려면 먼저 그 꽃들의 행복한 표정을 찾아내야 한다. 울타리 안에 줄 맞추어 힘없이 늘어선 그 꽃들이 왜 불행한지 알아야 한다. 당신이 신념 가득찬 들빛사진가로 되려면 표본실..

2018. 10. 30. 13:52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42

붉은대민들레/상제나비 | 나비들은 상제가 없다. 곤충학자들은 마음대로 이름 달지마라. 어떤 카메라로 꽃을 찍으면 좋겠냐고 인생상담처럼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다. 약간의 유리와 쇠붙이로 만들어진 기계. 카메라는 그냥 차가운 도구일 뿐이다. 그놈은 느낌도 없고 철학도 없다. 별 생각없이 카메라의 성능에 의존해서 기술로만 찍는 사진은 생명없는 사진이다. 사진, 어떻게 찍을 것인가? 그보다는 사진, 왜 찍는가?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박인식에게 물어보자. 내가 준 몽블랑이 그 멋진 글을 써주더냐고. 마찬가지다. 사진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나는 아직 중형 카메라에 필름 넣어 꽃을 찍는다. 물론 소형 카메라에 비해 기능은 떨어진다. 대신에 고화질의 선명한 화면을 얻는다. 현상 후에 보는 맛도 시..

2018. 10. 22. 08:00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41

쥐방울덩굴 | 덩굴에 비해서 방울 열매가 너무 작다고…. 그래서 쥐방울이라고. 꿀을 빨아가는 나비들이 꽃잎을 다치거나 꽃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는 얘기를 나는 아직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꽃 저꽃 넘나들며 벌들은 꽃가루를 묻혀 가지만 꽃술을 망가뜨리는 걸 나는 본 적이 없다. 쥐방울은 덩굴이니까 중간을 잘라내면 저 위까지 상하니까 슬쩍 잡아댕겨 그냥 찍었다. 나중에 가을에 주렁주렁 탐스럽고 실한 열매로 여물라고 그냥 찍었다. 가끔씩 어쩔 수 없을 때 나는 꽃을 꺾어 찍기도 한다. 생각없는 사람들, 꽃 꺾는 다고 뭐랜다. 할 말 많으면 나하고 말싸움 한번 붙어보자. 꺾어 찍어야 할 이유를 알만큼 가르쳐 줄 테다. 백두산에 곰들이 사라지면서 들쭉들이 웃자라 열매들은 야위고 씨를 못 맺는다는 거 아는가..

2018. 10. 15. 22:09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40

두메부추/박각시 | 박각시 작업 들어가는 중. 잠시 후 속잔치. 산꼭대기에서 여러날을 살아내려면 먹을거리가 큰 문제다. 먹고 살기가 힘든다. 겨울에는 그런대로 쉽다. 산이 냉장고니까. 돼지고기와 김치만 잔뜩 지고 올라가도 좋다. 눈을 녹여 김치찌개 날마다 해도 질리지 않는다. 요리하기도 아주 쉽다. 눈이 계속해서 내리면 좁은 텐트 속에서 김치전도 하고 만두도 빚는다. 눈이 개이기를 기다리며 요리를 즐긴다. 여름에는 모든 음식이 썩어서 어렵지만 빗물 받아 수제비나 칼국수까지도 해 먹는다. 북어대가리와 멸치로 육수를 낸다. 화학조미료 안 쓴다. 열흘쯤 안 씻은 손으로 음식 만드는 일도 나 혼자만 즐긴다. 다른 동무들은 침만 삼키고 구경만 한다. 사진은 나의 직업이고 요리는 나의 취미다. 백두산 전체가 청정한..

2018. 10. 8. 16:23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39

큰금매화 | 금매화는 중국이름이다. 이십 년 가까이 중국을 드나들다 보니 그 동안의 귀동냥으로 쉬운 말은 조금씩 한다. 버스에서 왁자지껄 옆사람들 떠드는 소리도 대충 알아듣는다. 내 중국핸드폰에 한자로 메시지가 오면 나도 한자로 답을 보내고나서는 나 절로 신기해서 좋아한다. 산에서 도와주는 건국이도 운전사 홍생이도 조선말 전혀 모르는 진짜 중국 동무들이지만 내 짧은 중국말로도 함께 일하는 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 “同志們, 辛苦了! 我是拍撮野生花的韓國人.” 서툰 중국말 몇 마디에 서슬퍼렇게 검문하던 압록강 변방짬 군바리 아저씨 활짝 웃는다. 나도 마주 웃어주며 가슴 속까지 환해진다. 맹국장네 집에 저녁초대 받아서 가는 날은 그 잘난 중국말로 내가 제일 많이 떠든다. 그들이 알아듣던 말던 내 목소리가 제..

2018. 10. 2. 10:20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38

솜방망이 | 옛날에는 도깨비방망이가 있었지. 산을 다시 살려내라, 뚜욱딱! 내가 처음 백운봉 뒤켠에 갔던 94년 여름. 거위목을 하고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청석봉 넘어 백운봉, 용문봉을 거쳐 소천지 꽃덤불능선까지 산은 짓밟혀 아주 큰길이 걸레처럼 나 버리고 말았다.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종주등반이라는 이름으로 줄을 서서 꽃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야생화트레킹을 한다고 떼를 지어서 솜방망이도 짓밟아 버리고 산돼지, 노루, 토끼들의 삶의 터전을 헐어내고 제 동네처럼 대대적인 토목공사로 큰길을 내 버리고 말았다. 2006년 9월 2일. 나는 백운봉을 넘으며 투덜댔다. “어떤 놈들이 산을 이렇게 망가뜨려 놨어?” 그런데 그날, 밤길에 하산하며 퍼뜩 정신이 났다. 종주등반을..

2018. 9. 25. 10:09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37

큰괭이밥 | 나 숨 넘어가려 할 때, 죽기 전에 코에다가 고무줄 끼우지 마라. 십여년 전 인도를 몇번 다녀오고나서 미련없이 죽으면 썩어버릴 몸뚱이를 기증했다. 그리고는 너무 오래 살아 이젠 낡아버려서 내 몸은 피부와 눈만 남에게 줄 수 있고 다른 데는 학생들 실습용으로밖에는 쓸모가 없다고 한다. 평생 혼자 산 속을 헤매며 힘겹게 알아낸 내 사진찍는 노루꼬리만한 잔재주와 생각들. 나처럼 사진 하나에 인생을 걸고 싶은 자, 그놈에게 나의 넋을 이어주고 갈 수는 없을까? 간을 이식하듯 뇌를 조금 떼주면 안 될까? 내가 가진 책들도 사진들도 모두 쓰레기로 버려지고 잊혀지는 거 하나도 아쉽지 않지만 내가 사진을 했던 싱싱한 생각들은 너무나 아깝다. 누구에겐가 물려주고 싶다. 그래서 나를 훨씬 뛰어넘는 사진쟁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