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김승곤의 사진읽기 - 나는 누구일까요?

#44. 김승곤의 사진읽기 - 나는 누구일까요?

사진 : 강영석

글 : 김승곤(사진평론가, SPC사진클럽 주임교수)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뒷산에서 멧돼지와 고라니들이 밭으로 내려와서 아직 익지도 않은 고구마며 땅콩을 먹어 치웁니다. 큰 발자국에 쬐그만 발자국들이 섞여 있는 것을 보면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신기하게 한 줄씩은 꼭 남겨두고 가니까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도 노루와 고라니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머리에 뿔도 없고 턱에 수염도 나지 않은 것을 보니까 염소가 아닌 양이 분명합니다.

어렸을 때 옆집에서 염소를 길렀는데 염소가 담배를 잘 먹는다는 얘기를 듣고 몰래 아버지 담배를 몇 개피 훔쳐 들고 가서 먹인 적이 있습니다. 아, 종이도 좋아한다고 해서 교과서 앞쪽에서 몇 장 뜯어서 먹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정말 맛있게 잘 받아 먹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염소에게 좋은 일을 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보통은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어야 할 녀석인데, 이렇게 목책 사이로 고개를 들여 밀고 뭔가 열심히 말을 걸고 있네요. 아마도 손에 건초가 담긴 바구니를 든 아이에게 빨리 달라고 조르는 거겠지요. 원래 양이 사람처럼 보이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 애절한 표정으로 뭔가 열심히 어필하고 있는 녀석을 보니까 꼭 사람 얼굴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가까이에서 잘 귀를 기울여보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뭐, 걸작사진이 따로 있나요?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진지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진이 걸작사진 아니겠습니까? 이 사진을 찍으신 분, 틀림없이 동물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을 겁니다.

 

: 김승곤(사진평론가, 국립순천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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