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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2. 10:20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38

솜방망이 | 옛날에는 도깨비방망이가 있었지. 산을 다시 살려내라, 뚜욱딱! 내가 처음 백운봉 뒤켠에 갔던 94년 여름. 거위목을 하고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청석봉 넘어 백운봉, 용문봉을 거쳐 소천지 꽃덤불능선까지 산은 짓밟혀 아주 큰길이 걸레처럼 나 버리고 말았다.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종주등반이라는 이름으로 줄을 서서 꽃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야생화트레킹을 한다고 떼를 지어서 솜방망이도 짓밟아 버리고 산돼지, 노루, 토끼들의 삶의 터전을 헐어내고 제 동네처럼 대대적인 토목공사로 큰길을 내 버리고 말았다. 2006년 9월 2일. 나는 백운봉을 넘으며 투덜댔다. “어떤 놈들이 산을 이렇게 망가뜨려 놨어?” 그런데 그날, 밤길에 하산하며 퍼뜩 정신이 났다. 종주등반을..

2018. 9. 25. 10:09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37

큰괭이밥 | 나 숨 넘어가려 할 때, 죽기 전에 코에다가 고무줄 끼우지 마라. 십여년 전 인도를 몇번 다녀오고나서 미련없이 죽으면 썩어버릴 몸뚱이를 기증했다. 그리고는 너무 오래 살아 이젠 낡아버려서 내 몸은 피부와 눈만 남에게 줄 수 있고 다른 데는 학생들 실습용으로밖에는 쓸모가 없다고 한다. 평생 혼자 산 속을 헤매며 힘겹게 알아낸 내 사진찍는 노루꼬리만한 잔재주와 생각들. 나처럼 사진 하나에 인생을 걸고 싶은 자, 그놈에게 나의 넋을 이어주고 갈 수는 없을까? 간을 이식하듯 뇌를 조금 떼주면 안 될까? 내가 가진 책들도 사진들도 모두 쓰레기로 버려지고 잊혀지는 거 하나도 아쉽지 않지만 내가 사진을 했던 싱싱한 생각들은 너무나 아깝다. 누구에겐가 물려주고 싶다. 그래서 나를 훨씬 뛰어넘는 사진쟁이가 ..

2018. 9. 18. 10:44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36

큰솔나리 | 솔잎을 닮아 솔나리. 대가리가 커서 큰솔나리. 우리는 음식맛이 좋은 식당을 찾아 먼 데까지도 간다. 입맛을 위해서다. 어떤 때는 좋은 귀맛을 찾아 음악회에 가고 큰 돈을 들여 고급 음향기기를 구입한다. 심심풀이로 남의 귀한 목숨을 빼앗는 철없는 자들, 손맛을 위해 낚시를 한다는 잔인한 자들도 있다. 입맛 귀맛 만큼이나 중요한 맛이 있다. 조금은 낯선 말이겠지만 눈맛이다. 눈요기라는 말이 있다. 눈으로 요기한다.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그런 뜻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재발견해서 표현하는 일이 사진이다. 사진가는 보통 다른 사람들보다 눈맛을 더 즐길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음악을 들을 줄 모르는 청각장애인. 눈 멀뚱히 뜨고 못 된건 다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줄 모르는 ..

2018. 9. 11. 10:10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35

하늘매발톱꽃 | 얼큰, 3등신도 못 되지만 이쁘다. 얼큰, 이쁘다. 잎도 없이 어떻게 이런 실한 꽃을 피워냈을까. “풍속 제로, 바람없이 맑겠습니다.” 그것은 기상관측 용어일 뿐이다. 알릴듯 말듯 꽃을 흔들어대는 바람은 풍속계가 감지 할 수 없을 만큼이다. 렌즈와 매발톱꽃과의 거리는 약 40cm. 숨조차 쉬지 못하고 파인다에 집중한다. 아래에서 윗쪽으로 기계를 설치하면 낮게 엎드려 코를 땅에 박아야 한다. 적을 향해 총을 겨누듯 하는 긴장감. 그러나 바람과의 대결은 아니다. 대화다. 설레는 기다림이다. 키는 꺽실하고 머리는 무거워서 매발톱꽃의 흔들림은 유난히 야단스럽다. 그래도 바람은 어느 때인가 멎는다. 바람은 잠시 쉬어 가는 때가 있다. 지나가던 바람이 다리쉼을 하는 그런 때를 틈타 조리개를 열고 닫..

2018. 9. 4. 09:49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34

칼잎용담 | 용담과는 식성도 성격도 사는 곳도 비슷한데 잎만 조금 다르다. 용담과 칼잎용담은 구별하기 어렵다. 이름도 비슷하고 모양도 비슷한 용담이 여러 가지라서 알아내기 아주 어렵다. 다닥냉이, 콩다닥냉이, 물냉이, 황새냉이, 는쟁이냉이, 말냉이, 좁쌀냉이, 싸리냉이. 자세히 구별할 필요 없다. 아무 냉이나 캐서 무쳐 먹거나 된장국 끓여 달게 먹을 수 있다.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 숲바람꽃, 세바람꽃, 만주바람꽃, 변산바람꽃. 바람꽃도 참 많다. 난초의 종류도 엄청 많아 책 한 권이 넘친다. 꽃이름 몇 가지 안다고 잘난 척 하지 말자. 분류학자 흉내내며 아는 체하지 말자. 제비꽃하고 바람꽃하고 알아보면 된다. 사진쟁이는 꽃들과 눈맞아 정을 통해야 한다. 사진쟁이는 꽃이름보다 그들의 마음을 먼저 알아야..

2018. 8. 28. 10:56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33

용담 | 뿌리의 약효가 용의 쓸개보다 좋다고? 용도 없는데…. 산에서는 아침을 잘 먹고 점심을 잘 먹고 저녁을 잘 먹고 그래야 한다. 집에서도 그렇게 잘 먹어야 한다. 산을 오르고 내리고 사진 찍는 일. 정신, 육체 노동에 막대한 에너지를 요한다. 정신력의 한계는 체력으로 극복한다. 그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잘 먹어야 한다. 동네에 내려와서 혼자 먹기 싫거나 돈 아까울 때나 바쁜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씩 끼니를 거를 때도 있지만 산에서는 한끼도 안 거른다. 나는 과식주의자다. 밥도 남들보다 많이 먹는다. 그래야 중장비 메고 여러 날 산을 뛰어 다닌다. 우리 주치의 선생님 임은철 원장님. 고지혈환자 과식하면 큰일난다고 진료 때마다 겁주시지만 중국에서 돌아오는 날 또 삼각산 갈 수도 있는데 조금 먹고는 산에 ..

2018. 8. 21. 10:10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32

삼지구엽초 | 세 줄기에 잎이 아홉 개, 하여 삼지구엽초. “남자의 생식기가 능력을 상실하여 잘 일어서지 못하거나 어쩌다 일어났더라도 오래가지 못 하고 주저앉아 버릴 때 이 삼지구엽초를 그늘에 말려 음양곽으로 만든 다음 술에 불궈 아침저녁 반주로 한 잔씩 마시거나 그늘에 말리워 고르롭게 가루내어 따뜻한 물에 녹차 마시듯 하루에 수 차례 장복하면…” 조선글로 된 〈묘방전기〉라는 중국책에 있는 글이다. 얼마 전까지도 설악산 오대산에 떼지어 여기저기 이 삼지구엽초들이 살고 있었는데 비와구라가 없던 시절이라서 그랬던지 유통기한 지난 자지도 재활용 해보자고 그랬던지 . 죄다 몰려가서 뿌리까지 캐먹는 바람에 지금은 찾아도 볼 수가 없다. 씨가 마른 듯 하다. 비슷하게 생긴 개구엽까지 뜯어먹고 거시기가 완전히 망..

2018. 8. 13. 20:59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31

바위구절초 | 바람은 함부로 부는 게 아니다. 그렇다. 바람이다. 빛이다. 그래서 자연은 風光이다. 고산화원을 저렇게 피워내는 것은 빛이고 바람인 것이다. 풍광으로 살아난다. 백암봉으로 몰아친 四方風은 화산돌을 하늘로 날려 보내버렸고. 자동차 문을 못 열어 차에서 내릴 수 없게 했다. 흑풍구에서는 유람질하던 어떤 이는 바람에 떠밀려 절벽 아래로 날아가 버렸다. 나, 사진 못 찍겠다고 삼각대 접었다. 그런데 이 구절초들은 며칠 밤낮을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미친 바람이 잠시도 쉬지 않고 흔들어대도 맨몸으로 받아내고 끄덕도 없는 것은 열매를 맺기 위한 간절한 소망인 것이다. 그렇게 열매를 맺으면 바람은 또 한번 구절초의 씨앗을 멀리 날려 보내줄 것이다. 그 바람은 함부로 부는 게 아니다. 꽃들을 위해서 ..

2018. 8. 6. 14:08

안승일의 우리동네 꽃동네 #30

서백두 | 하늘이 검푸르게 빛나는 어느날 어느 순간 햇빛에 반사되는 산정은 눈 보다 희게 빛난다. 백두산은 눈이 없는 여름에도 흰머리산이다. 흰눈이 쌓여서 그 이름이 백두산이라면 그 숱하게 많은 만년설의 고산은 죄다 백두산 아닌가. 백두산은 만년설로 희게 보일만큼 높지도 않다. 먼 옛날 화산폭발로 천지 주변은 칼데라 벽이 병풍처럼 멋진 풍광을 이루면서 이 때 생긴 암석은 주로 회백색, 자회색의 거품돌들이다. 바람에 날리거나 천지 물 위로 떠다니기도 하는 이 부석 때문에 산은 그렇게 희게 보일 때가 있다. 천문봉의 옛이름도 흰돌이 많아 백암봉이다. 1751년 갑산 부사 이의철의 “백두산기”에도 ‘ 이 산을 백두라 부르는 것은 산 위의 백암봉 회백색 부석이 멀리서는 희게 보인다.’ 고 했다. 한여름, 산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