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최금화 - Beyond here展

[전시안내] 최금화 - Beyond here展

* 장소 : 류가헌

* 기간 : 20211116() ~ 28(일)

* 오프닝 : 1116일 화요일 6

 
최금화 <Beyond here> Pigment Ink on Fine Art Paper

 

 

 

여기 너머, 환영과 각성의 사이공간

- 최금화 사진전 <Beyond here>, 1116일부터 류가헌

 

여기, 두 개의 풍경이 있다. 하나는 철거를 앞두고 있는 옥수동 12지구주택 내부이고, 또 하나는 도심 곳곳에 있는 골프연습장들의 풍경이다. 언뜻 보면, 두 사진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골프연습장은 모두 어두운 저녁 시간에 촬영한 데 비해 옥수동 주택 내부는 아침이나 낮에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에 의지해 촬영했으니 오히려 서로 대척점에 선 느낌마저 준다.

 

공통점이 있다면, ‘옥수동 12지구골프연습장두 풍경 모두 사진가 최금화가 찍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둘은 <Beyond here>라는 하나의 제목 아래, 전시와 책으로 묶였다. 이것만으로도 ‘Beyond here’가 궁금해진다. 여기 너머, 무엇이 있을까.

 

옥수동 주택 내부를 촬영한 <Beyond here - Listen to the voice>(4*5 Film). 빈 방 가운데 코끼리 모양의 초록색 물조리개가 놓여있다. 버려진 공간에 역시나 버려진 작은 물건 하나가 있는 풍경일 따름이다. 그런데 코끼리의 코는 유선형을 그리며 공중을 향해 있다. 기운차게 물을 뿜을 때의 모양새다.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투과된 코끼리의 몸통은 투명할 정도로 밝아서, 뜯긴 벽지, 허물린 천정의 남루와 스산을 가린다. 흠씬 젖어있는 바닥조차 어쩌면 코끼리의 짓일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면, 분명하던 폐허의 공간은 오리로도 보이고 토끼로도 보이는게슈탈트* 착시가 일어나는 풍경으로 바뀐다.

 

골프연습장을 촬영한 <Beyond here Green net palace>. 푸른 그물벽을 둘러친 철재구조물은 누가 보아도 골프연습장이다. 그런데 어느 저녁, 골프연습장의 초록 불빛이 산 능선을 넘거나 안개 속에 번지는 순간, 시지각정보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늘비하게 늘어선 침엽수들을 거느리고 제 그림자를 수면에 비치고 있는 모습은 마치 해자에 둘러싸인 성이나 초록빛의 궁전 같기도 하다. 그 순간을 포착한 최금화의 골프연습장은 아니 <Green net palace>,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너머의 다른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보는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순간적으로 시지각적 감각을 이용해 심리적으로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 광고사진의 특징을 생각하면,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미국 SCHOOL OF VISUAL ARTS에서 파인아트를 공부하고 2020년 개인전 <Pain Tree>를 열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광고사진계에서 이름이 양명했던 최금화의 카메라아이(camera-eye)가 어떻게 <Beyond here>와 이어지는 지를 깨닫게 된다.

 

최금화 사진전 <Beyond here>1116일부터 28일까지, 사진위주 류가헌 1, 2관 전관에서 열린다. ‘마음의 눈에서 출간되는 동일한 제목의 사진집도 함께 만날 수 있다. 문의 : 02-72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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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슈탈트 전환(gestalt switch). 이미지나 형태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바뀌는 현상.

* 카메라아이(camera-eye). 카메라로 찍었을 때의 상태를 상상ㆍ판단할 수 있는 능력.

 

 

 

최금화 <Beyond here> Pigment Ink on Fine Art Paper

 

[작업노트] 나는 들어간다. 옥수동, 12지구안으로

 

존재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존재적 가치와 아름다움은 발견될 수 있다. 비록 남겨지고 버려진 것일지라도.

철거를 앞둔 옥수동 12지구. 그곳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잊히고 버려진 채 남겨진 공간이 있었다. 풍경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낯선 공간, 지나친 적막, 오싹하고 스산한 기운이 감돌아 저절로 경계심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나 철거라는 임박한 종말 앞에 놓인 공간이란 생각에 쓸쓸하고 음산한 풍경임에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적 당위성과 개성, 아름다움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과 빛, 기억이라는 텍스처로 버려진 데에 대한 서운함과 이별의 아픔을 표현하고, 곰팡이와 먼지로 한 폭의 수묵화와 선화(禪畵)를 그려냈으며, 비와 바람으로 무상의 장면을 조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과거 타인들이 부여한 가치와 소유의 의미로부터 해방되었고, 더 이상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정지된 시간이지만 이보다 더 현실적으로 무상을 대변해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언젠가 이들의 존재는 먼지가 되어 또 다른 존재의 한 부분으로 새로운 기억을 꾸려갈 것이다.

 

사라질 것들이 침묵 속에 펼친 스토리의 일부를 살아있는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재건축의 위세에 눌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묻혀 있던 죽은 세상은 카메라 렌즈 너머에서 빛과 바람, 시간, 추억들이 한데 어우러진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자체로 독창적이고 매력적이었다. 현실이 가리고 있던 소중한 어떤 것들이 제 모습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들은 동일한 것이 없다. 각자 나름의 기억과 쓸모, 감정을 기록하고 있다. 남겨진 물건은 남겨진 채로 어떤 이들의 기억과 감정을 상기시키곤 한다. 시간을 머금고 자리를 지키는 것만 같다.

 

한때 각각의 건물과 방은 고립되고 분리된 세상이었다. 이는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 의한 구분이었다. 인간들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그어 놓은 일종의 이었다. 그러다 차츰 인간의 발길이 끊기고, 모호해진 경계는 하나의 거대하고 고독한 덩어리가 되었다.

남겨지고, 버려지고, 없어질 것이기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건지 모르겠다. 혹은 남아있는 공간과 감정에 호흡을 맞추다 보니 추억으로 빠져드는 힘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우리 주변엔 우리의 인식 너머로 희미해진 공간이 많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지 간에 일단 무언가 알아차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공간을 탐색하다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내 안에 숨어있던 기억의 자화상 같기도 하다. 사라질 것들에 대한 존재의 명명을 다시 해야 할 것 같다. 그들은 없어지지 않고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로 기억될 것이다. 과거에 가졌던 고유의 의미와 가치에 새로움을 더하는 채색의 과정을 거쳐 색다른 존재로 재탄생할 것이다.

 

Greennet Palace

 

어느 날 운전을 하던 중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산 능선 사이로 강렬한 초록 불빛이 퍼지고 있었다.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기세는 강렬했다. 마치 산 너머 외계함대가 착륙한 것 아닌지 착각이 일 정도였다. 의문의 순간을 목격한 뒤로 난 불빛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마침내 알게 된 사실은 빛의 근원이 골프연습장이라는 것이었다. 이목을 끌었던 골프연습장은 밤이면 초록빛을 뿜어냈고, 낮과는 다른 위상을 드러냈다. 화려하고 웅장하며, 때로는 수많은 판타지를 보여주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던 어떤 것이 문득 새롭게 각인됐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 오롯하게 서서 강렬한 초록빛을 퍼뜨리는 골프연습장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려 한다.

 

거기는 초록 그물 궁전이라고.

 

 

최금화 <Beyond here> Pigment Ink on Fine Art Paper

 

[전시서문] 사라짐과 나타남: 도시에 관한 아포리아적 시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파우스트> 등으로 유명한 독일의 문호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832년 사망 직전에 빛을, 좀 더 많은 빛을”(Licht, mehr Licht)과 같은 특이한 말을 유언 삼아 했다고 전해진다. 때는 322, 꽤 추운 날씨에 어둡기도 했을 것이다. 생명이 다해가는 거장에게 빛은 무엇이었을까. 차디찬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자연의 난로이자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찬란한 상징이 아니었을까. 상징이 아닌 진짜 생명을 보려면 일어나 창가로 가야 했다. 그렇게 안 되니 빛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빛은 태양으로부터 그에게 쏟아지는 아름다운 꽃이었을 것이다.

태양이 없는 어둠의 세계에서 인간은 문명의 꽃을 피웠다. 중세시대에는 호롱불이나 촛불이 있었지만 산업화 시대에 들어와 목가적인 호롱불의 미학, 가느다란 촛불 미학의 세계가 사라진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야속하게 부화뇌동하며 춤추던, 불안정했던 촛불을 역사의 뒤안길에 남겨두고는, 전등이 나타났다. 주로 네모 형태였던 투박한 초기 전등은 안정적인 인공 빛을 제공하였다.

 

최금화 작가의 <옥수동 12지구 안으로>, < Green Net Palace> 시리즈의 사진들에서 나는 두 가지 빛을 본다. 폐허로 된 집을 바라보는 내 시야에 들어오려 하나 온전히 들어오지 못하는 자연의 빛인 햇살과 이미 거기 있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실외 골프 연습장이 뿜어내는 인공의 빛.

이 사진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당신이 보는 이 두 빛은 아름다운가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작가는 처음 옥수동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해 이방인으로서 그곳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옥수동 12지구 안으로> 시리즈에 관해 그는 재개발로 인해 떠나간 이들이 남겨두고 간 가옥들이 을씨년스럽다고 표현했지만, 나는 그 가옥들에서 창문 혹은 문으로 들어온 한 줄기 햇살 혹은 들어오려고 애쓰는 것만 같은 햇살을 봄으로써, 사진 속 피사체들을 을씨년스럽지만은 않게 본다. 그러고 보면, 남겨진 것들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빛이다. 사진들은 시간의 기억을 간직한 채 오랜 기간 삶의 흔적이 남겨진 공간 특유의 어떤 냄새를 환기하고 있다. 이것은 폐허 이미지, 비어있는 허전함, 먼지, 미세먼지인지 안개인지 불분명한 부유하는 그 무엇들, 곰팡이, 어쩌면 세균과 바이러스를 포함해 온갖 부정적인 것의 감각을 표상한다. 햇빛은 그 냄새를 중화시키며 사람이 살았던 흔적과 함께 긍정적인 그 어떤 것들을 느끼게 해주며, 앞서 말한 부정적인 것들을 중화하고 상쇄시켜준다. 햇빛으로 인해 남겨진 오브제들은 자연스러워지고 애잔해진다. 남겨진 오브제들은 그것들이 놓여있는 공간과 그런대로 조화되는 것 같다. 그의 사진들은 그래서 탈정치적이다. 아니, 초정치적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침략적 재개발의 역사를 보아 왔고 어떤 조건에서 그런 역사가 좀 나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음도 안다. 물론 사진은 이곳에 살았던 거주민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아스라한 햇빛이 막연한 희망을 느끼게 해준다.

 

창 혹은 문이 보이는 사진들에서 햇빛은 분명히 보이지만 벽만이 찍힌 곳에서도 그 존재가 어렴풋이는 보인다. 출처가 확인되지 않고 무척 약한 햇볕, 즉 어둠 속 피사체도 있긴 하다.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일체의 빛이 없다면 어떤 피사체도 찍히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맨눈으로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이런 의미의 어둠이 찍힌 것은 당연히 아니다. 햇볕이 약한 상대적 어둠의 세계를 표현한 두 작품은 공교롭게도 피사체가 벽이다. 그 위에 그 어떤 것도 걸려있지 않고 그 아래 그 어떤 것도 놓여있지 않은 벽. 단지 벽지가 좀 찢어져 있거나 찢어져 있지 않으면 꽤 낡아 보이는 벽. 최금화 작가의 세계에서 오브제가 많으면 빛이 강하고, 적으면 빛도 약하다. 빛의 이러한 차등적 쓰임새는 계획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꽤 큰 역할을 하는 햇빛의 존재는 어쩌면 작가의 무의식 지평에서 오래전부터 고려되고 있었을 것이다.

 

폐허로 남은 방들은 떠나간 이들의 과거를 함축하지만 화려하게 개발될 미래 역시 암시한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슬프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건 체념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죽고, 만나고, 이별하고, 떠나가거나 돌아오고, 절망하거나 기뻐한다. 그 안에는 늘 생명력이 있다.” 이 사진들은 생명력에 대해, 생명력이 그 안에서 작동하는 생명에 대해 그리고 생명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지나간 골목의 어떤 집에 흩뿌려진 사물들은 현재에 새롭게 계열화되어 성좌를 이루며 여러 기억을 내포하게 하며 사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처럼 최금화 작가는 도시를 들여다보는 행위를 통해 숨겨진 역사, 내밀한 서사를 끄집어내고 관계 맺음을 통해 자신만의 공간으로 탄생시켜, 현실화된 유토피아의 장소인 헤테로토피아(heterostopia) 구축해낸다.

 

도시는 밤이 되면 자동차 불빛. 가로등 불빛과 같은 인공의 빛으로 포위되어 미디어 공간으로 탈바꿈한다빛의 시간은 스스로가 물성화된 현실 공간을 파괴하고 공간을 역동화하면서 시간이 존재한 공간을 탈 공간화한다. 랄프 슈넬(Ralf Schnell)은 공간과 시간의 범주가 점차 경험에 기초하여 정형화되던 전통적인 개념을 벗어나며 특히 공간은 더 이상 정적인 단위인 장소가 아닌 시각화의 다채로운 장이자 서로 다른 지각 내용과 본질들이 교차되는 소실점으로 변모됨을 언급했다.

 

도시라는 텍스트의 거대 담론의 가속화된 장은 무수한 종류의 빛의 형상들에 의해 역동화된다. <Green Net Palace> 시리즈에서 초록색 빛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장소 고유의 과거 역사와 현재가 만나면서 형질변환이 이뤄진다. 밤의 공기가 내려앉으면 초록색의 빛을 품어대는 그물 패턴의 골프장은 도시 속 또 다른 생명으로  나타난다.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대도시가 이미지의 홍수 속에 변화되는 광경을 낯익은 도시를 낯익지 않은 동력이, 어둡고 거대한, 대중을 황홀하게 하는 전시 공간이 대체한다. 그 공간에 있는 (시청각적이고 자동차의) 속도의 빛이 태양빛을 대체한다. 더 이상 연극공연장(공회당이나 광장)이 도심의 핵이 아니다. 오히려 도시 조명이 펼친 빛의 유희가 그 핵이 된다. 이로써 우리는 원초로(빛으로) 되돌아간다. 마치 지평선 없는 사막으로 되돌아가듯이." 라고 묘사했다.

 

“Anamnestic Aesthetics!” 엘렌 디사나야케(Ellen Dissanayake)은 자신의 저서 미학적 인간에서 인간의 예술 활동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어떤 성향으로부터 발전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은 쾌감을 느끼는 뇌의 부분들을 아주 오래전부터 탑재하고 있었고, 그런 부분들이 작동함으로써 의식되는 쾌감의 느낌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많은 생명은 태어나서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도 - 쾌감을 한 번도 추구해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으면서도 - 쾌감을 추구하기 위해 가진 애를 쓴다. 너무나 강력한 느낌이란 너무나 잘 기억이 되는, 몸으로 기억이 되는 어떤 것이다. 많은 상품에 노출된 후기 산업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기억시켜 팔게 하려는 회사들이 아름다움에 호소하는 것은, 이렇게 본능적으로 미학적인 인간들을 대상으로 할 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미학도 산업이 된다. 전기에 의한 빛도 꽃이 되며 빛들은 꽃들의 군락이 된다. 오늘날 도시는 더욱 화려해진 자태를 띤 인공의 빛으로 넘쳐난다.

 

인공의 빛으로 치장된 골프 연습장에서도 사람들이 만나고, 이별하고, 떠나가거나 돌아오고, 절망하거나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작가에게 폐허로 찍힌 장소들에 비해서 골프 연습장에서는 삶이 얕다. 비록 빛으로 무마되고 도배되고 있지만, 그 폐허는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일상적으로 절망하고 기뻐했던 곳이며, 떠나가고 남겨둔 장소이고, 죽고 태어나고 헤어진 곳이다. 골프 연습장에서 빛은 햇빛이 아니고 인공의 광원인 전등에서 온 것이며 강력한 현재다. 그곳에서 빛은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찰나의 순간에 켜지고 꺼지는 허수아비이고, 그것을 통제하는 배후의 인간 권력자에게 무력하다. 허수아비 빛에는 역사가 없다. 을씨년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떠나간 가옥이 아니라 형광색 골프장이다.

 

조나단 크래리(Jonathan Crary)관찰자의 테크닉(Techniken des Betrachters에서 17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기술 발전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카메라 옵스쿠라임을 지적한다. 그것은 광학 기술을 통해 시각적 경험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현실을 지각하게 하며 세계와 분리된 관찰자의 위상을 만들어내었고 대상에 대한 지각이 주관화되고 사유화된 주체가 등장하는 데 기여했다. 환등기(Magic Lantern)은 이러한 카메라 옵스쿠라의 발전 단계에서 나타났고 사진의 마술적 유산은 투사 기술을 통해 환상과 마술적인 효과를 주며 어떤 이야기의 서사적 관련성을 나타내며 대중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Green Net Palace> 에 나타난 초록빛 그물망은 도시의 미디어 환경을 구성하는 이미지 투영이자 하나의 인터페이스로 고려될 수 있다. 따라서 액체처럼 유동적인 비물질적 이미지는 관객들이 촉각적 마티에르를 기반으로 일종의 가상공간을 체험하게 한다.

 

작가의 궁극적 피사체는 폐허가 아니다. 골프장도 아니다. 폐허를 비추는 빛? 골프장을 비추는 인공의 빛? 이렇게 말하면 반만 맞은 셈이다. 두 종류의 빛의 대조 혹은 이중주라고 해야 적절할 것이다. 어느 빛 아래서도 오브제들은 다소 희미하다. 오브제 그 자체가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방향, 강도 등의 변화에 따른 오브제의 변화를 포착한 것이 인상주의임을 떠올려본다면 그의 작품들도 인상주의적이다. 그러나 <루앙 성당> 시리즈에서 모네(Claude Monet)가 했듯이 시시각각 빛이 변화할 때마다 그 빛에 놓여있는 같은 오브제를 계속 달리 찍지는 않았다. 같은 오브제가 아닌, 같은 종류의 오브제를 빛의 변화에 따라 달리 찍은 것이다. 모네와 극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작가는 겉으로는 인상주의의 럭셔리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재에 몰두한 그의 감상자들이 놓치기 쉬운 점은 빛의 향연에 대한 그의 관심이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집의 창과 벽 등이 막고 있음으로써 더 들어올 수 없는 것 같은 햇살이 포착된 <옥수동 12지구 안으로> 시리즈 속 폐허의 사진들에서 빛과 어둠의 경계는 불분명하고 어둠도 온전치는 않다. 고로 이 작품들은 연속성의 세계다. 반면 자연의 어둠 때문에 더 퍼져나갈 수 없는 것 같은 인공의 빛이 포착된 < Green Net Palace> 시리즈 속 사진들에서 빛과 어둠의 경계는 분명하다. 작가는 작품 전체를 둘로 구분해 왼쪽 혹은 오른쪽에서 완벽한 검은 화면을 보여준다. 검은 화면 왼쪽 옆 혹은 오른쪽 옆의 골프장의 빛은 갑자기 벽을 만난 것 같다. 어둠은 온전하다. 이 작품들은 불연속성의 세계다.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마주치는 골프장을 이렇게 불연속적 세계로 포착하며 친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방식을 통해 보여준다.

 

현대인은 시각적 감각에 기반하여 도시에 관한 경험을 한다. 도시 공간에서 발견된 이질적이고 조화되지 않는 대상들은 상호 깨달음을 산출하는 대안적 패턴으로 병치된다. 도시의 판타스마고리아의 두 가지 핵심적 사례인 상품과 현대성은 집합적 무의식이 빚어내는 환상의 산물이다.

 

그의 사진들은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환기하는 이중효과 속에 균열을 드러내며 관객을 밝음과 어둠, 시간 논리와 공간 논리, 환영과 각성의 사이공간에 위치시키며 심리적 지각의 작동을 이끈다. 바라보고 있는 지금 여기그때 거기가 교차하는 가운데 도시의 주체는 경계를 넘나드는 지각 행위에 깊숙이 개입하며 관찰자의 경험을 통해 내부와 외부를 접합하며 내재적 의미의 공간을 구축하는 데 기여한다. - 손 영 실(매체 미학 박사, 경일대 교수)

 

최금화 <Beyond here> Pigment Ink on Fine Art Paper

 

최금화 KUMA CHOI

부산 출생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졸업

SCHOOL OF VISUAL ARTS (M.F.A.) 졸업

 

개인전

1989 Self-portrait, 한일관. 서울

1995 My Room, Noon 갤러리. 서울

2011 Bamboo, ILD. 서울

2020 Pain Tree, 류가헌. 서울

 

그룹전

1991 한국사진의 수평전 1. 토탈 미술관. 장흥

1992 한국사진의 수평전 2,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1992 미술과 사진, 예술의 전당. 서울

1992 Threshold Between Doors, Wooster 갤러리, 뉴욕

1993 지구로부터, Wardnasse 갤러리. 뉴욕

1993 무질서한 누드, Puchong 갤러리. 뉴욕

1995 '' , 선재 미술관. 서울

1996 열린 예술제, 동아갤러리. 서울

1996 새로운 시각전, 국립 현대미술관. 서울

1996 한국사진가로부터 2인전, Issis갤러리. 교토

1999 사진은 우리를 바라본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3 한국 패션사진전, 대림미술관. 서울

2017 Greennet Palace 안나갤러리. 대구

2018 프레임 이후의 프레임. 대구시립미술관. 대구

 

Film

2000 천사의 꿈 (단편 10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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