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남택운 - 그림의 담론: 그림에 대한 두 가지 선택展
[전시안내] 남택운 - 그림의 담론: 그림에 대한 두 가지 선택展
* 장소 : 서이갤러리
* 기간 : 2020.04.14 - 26
* 초대일시 : 2020년 4월 15일(수) 오후 3시
남택운 사진전 <그림의 담론; 그림에 대한 두 가지 선택> 전시에 부쳐
서이갤러리 대표 이상미
차가운 겨울을 이기고 찾아 올 찬란한 봄을 꿈꾸던 우리의 바람이, 언제부터인가 저 북쪽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날려 버린 지 꽤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늘 희망의 봄을 기다려 왔다. 그러나 2020년, 올 해의 봄은 그 희망마저도 저버린 채, 온 세상에 스며든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에게 가혹한 시간을 안겨주고 있다.
개관 3년차로 접어드는 서이갤러리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과 포트폴리오로 작업을 보여준 작가들, 갤러리의 관람객들, 모두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작가들의 작업에 대한 열정과 전시를 준비하는 노력을 보면서, 전시 기획자로서 무안한 책무를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고된 준비과정 속에서도 설렘과 기쁨을 가지고 전시를 준비하는 작가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분들의 예술을 향한 열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음이 뿌듯하였다. 그 중에 단연, 오는 4월 14일부터 시작되는 <그림의 담론; 그림에 대한 두 가지 선택>의 남택운 작가의 열정은, 작가가 전시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준 최고의 작가였다. 서이갤러리에서의 전시 결정과 함께 전시 주제가 결정되고 나서도, 그는 전시 주제와 전시 공간에 맞는 세부사항까지도, 철저하게 깊은 고뇌를 통해 준비하는 작가였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해 가던 전시를 작가는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 비통하게도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비보였으나 그의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과 전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자, 기획했던 남택운 사진전 <그림의 담론; 그림에 대한 두 가지 선택> 전시를 예정대로 열게 되었다. 이 번 전시는 비록 작가 자신이 선보이려 했던 전시의 미학을 전부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작가가 이 번 전시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한 부분은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랜 기간을 ‘무엇인가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예술가의 임무’를 학생들에게 예술교육으로 전달한 교육자가, 이제는 그 예술가의 임무를 작업을 통해 실현하려 했으나 그것을 다하지 못하고 떠남에, 그의 전시를 같이 기획했던 기획자로서, 안타까움과 슬픔이 밀려온다. 하지만 작가의 사유가 담긴 작업들이 남아있고, ‘무언가를 전달받은’ 학생들이 그를 대신해 참다운 예술의 길을 대신 갈 것이라 믿기에, 오래 슬퍼하지 않기로 하였다. 많은 분들이 어려운 시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묵묵히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기에, 서이갤러리도, 갤러리로서 가던 길을 힘내서 가려 한다.
이 번 남택운 작가의 사진전 <그림의 담론; 그림에 대한 두 가지 선택> 전시 기간 중, 서이갤러리 전시 관람을 통해 한 작가의 고뇌 어린 작품에서 예술을 보는 담론에 대해 여러분들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전시서문
전시제목: <그림의 담론: 그림에 대한 두 가지 선택>
경계의 미학
박상우(사진미학)
남택운 작가의 전체 작업을 가로지는 줄기는 ‘경계(borderline)’의 미학이다. 미술과 사진, 이론과 작품, 작품내부와 외부,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이다. 그의 작품에서 ‘경계’란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것’ 혹은 ‘이쪽이자 동시에 저쪽인 것’을 함께 의미한다. 이 같은 경계의 예술은 작가의 삶 자체에서 연유한다. 작가는 한 영역에 갇혀 머무는 것을 언제나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그는 항상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자유롭게 이동하고자 했다. 심지어 여러 영역에 동시에 머물고자 했으며, 그러한 ‘동시적 공존’에서 삶과 예술의 가치를 찾았다. 이러한 유동성과 동시성은 작가가 평소에 강조했던 ‘포스트모던 인간’의 삶의 방식이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작가는 초기에는 회화(민중회화)에 전념했지만, 이후 팝아트에서 사용하던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대중 스타의 사진을 복제하는 사진작품(<사진의 음모>(2000년))을 제작했다. 이후에는 더욱 더 ‘사진적인(the photographic)’ 사진, 소위 스트레이트 사진(<그림의 담론 프로젝트>(2004-2020)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작가는 결코 미술에서 사진으로 이동한 것도 아니고, 혹은 미술을 아예 떠나거나, 그렇다고 오로지 사진에만 전념한 것도 아니다. 2000년도 이후 제작된 그의 스트레이트 사진은 미술(더 정확히는 서양미술사)에 대한 작업이며, ‘미술의 사진’ 혹은 ‘사진으로 표현된 미술’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통시적(通時的)으로나, 동시적(同時的)으로 미술과 사진의 ‘사이에’ 존재한다.
남택운의 작업은 또한 이론과 작품의 경계에 위치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일련의 작업 프로젝트의 제목은 <그림의 담론>이다. 이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작가는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그림을 ‘담론 이미지’라고 규정하고, 이 담론 이미지를 카메라로 선택하거나 변형하여 작품으로 제작한다. <그림의 담론>은 이미 미술사에서 담론이 된 그림을 작가의 현대적인 독특한 시선으로 사진을 통해 비평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림의 담론>은 과거의 ‘담론의 그림’을 현재의 그림(작가의 작품)을 통해 담론화하는 것이다. 결국, 남택운의 작품은 완전한 담론(이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상의 작품처럼 순전한 예술작품도 아닌, 담론과 예술작품의 사이에 존재하는 ‘이론-작품’ 혹은 ‘작품-이론’이다. (이러한 사유는 작가가 지인들에게 평소에 수없이 강조했던 그의 독특한 예술철학이다.)
<그림의 담론>의 첫 번째 프로젝트인 <차이(Difference)>는 작가가 프랑스 루브르미술관을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작가는 미술관에 걸린 유명한 그림 자체보다는 그림을 둘러싸고 있는 액자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액자의 일부분을 다양한 프레임을 통해 열정적으로 촬영했다. 왜 하필 액자일까? 액자는 작가에게 단순한 장식의 도구가 아니라, 그의 작품 전체에 스며있는 ‘경계’ 혹은 ‘사이’라는 개념이 물질화한 형태이다. 언제나 경계에 집착하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욕망 때문에 작가의 시선은 루브르 명화에서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은 주변적인 사물에 자신도 모르게 향한 것이다! 액자는 작가의 시선에 작품내부도, 그렇다고 작품외부도 아니다. 그것은 작품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작가의 작업노트에 쓰인 것처럼- “액자는 예술권력이 되어 작품의 안과 밖을 가르는 힘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 예술작품과 예술작품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문화 권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액자는 작품내부와 외부를 완전히 분리하고 차단하는 단단한 벽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많은 구멍이 뚫려있는, 그물과 같이 성기게 짜여있는 얇은 망사(網紗)에 가깝다. 액자는 작품내부와 외부의 소통을 차단하는 벽이 아니라 오히려 소통을 유도하는 통로이다. 따라서 작품은 액자를 사뿐히 넘어서 작품 밖으로 무한히 확장된다. “이 작업[<차이>]에 보이는 것처럼 작품의 안과 밖의 차이는 명확하지 않게 보인다. [...] 미술관의 벽이나 복도 및 기타 시설물 모두 작품처럼 보였다. 루브르 미술관 전체가 예술작품으로 보여 졌기 때문이다.”(작가노트)
<그림의 담론>의 두 번째 프로젝트인 <품질보증절대미(The Super High Deluxe Beauty)>는 2006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인 레오 10세가 입었던 망토를 촬영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미술사에 등장하는 그림(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레오 10세>(1518))을 직접 촬영하지 않고, 이 그림에 나오는 망토의 실제 유품을 촬영했다. 그럼에도 이처럼 실제 사물을 촬영한 작가의 행위는, 적어도 작가의 사유에서는, 이미 담론의 이미지가 되어버린 라파엘로의 명화를 촬영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따라서 <품질보증절대미>도 그림을 사진을 통해 비평한 ‘그림의 담론’인 셈이다. 작가는 망토(혹은 그림속의 망토)에서 무엇을 담론화하고자 했을까? 그는 망토를 마주하면서 르네상스 미술의 최고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 소재는 교황 레오 10세의 망토이다. 르네상스의 메디치 가문 출신이며 교황이었으니 그의 유품을 촬영하는 순간은 르네상스 미술의 핵심이자 원천의 빛과 마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작가노트)
작가는 교황이 입던 망토의 전체를 촬영하지 않고, 액자 사진에서처럼, 망토의 일부분만 클로즈업해서 촬영했다. 그리고 이 작품에 ‘품질이 보증된 절대적 아름다움’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부여했다. 왜 이런 제목을 부여했을까? 그것은 교황이 입었으니 그 망토는 품질이 확실히 보증된 것이며, 그 망토는 또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를 창조했던 르네상스의 작품이기 때문에 절대미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영광과 빛을 담았으니 ‘절대미’라고 해도 되지 않겠는가.”(작가노트). 하지만, 이 작품은 작가에게 ‘절대미’이자 동시에 ‘절대추(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품질보증은 역사적으로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의 피의 역사로 이어졌고, 자본주의의 꽃이자 시궁창인 광고의 ‘미’에도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망토가 지닌 부정적인 의미를 작가는 직접 설파한다. “서구의 주도하에 흐른 5백년의 역사에서 수많은 침략과 약탈은 얼마나 많은 피와 흥망성쇠를 가져 오게 하였는지를 저 망토에서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광고에서 반복되는 ‘품질보증’은 소비자를 세뇌시키는 단어이다.”(작가노트). 따라서 <품질보증절대미>는 절대미와 절대추의 경계에 위치한다.
결국, <그림의 담론>의 두 작업에는, 미술사, 시각문화이론에 일평생 매진했던 한 예술이론가의 꿈이, 그리고 이렇게 습득한 이론을 제자들에게 온몸으로 전해주었던 한 사진교육자의 소망이, 그리고 교직에서 은퇴 후에 모든 것을 털고 오직 사진작업에만 매진하고자 꿈꿨던 한 중년 작가의 이루지 못한 불운의 예술적 열망이 담겨져 있다.
작가노트
Two Selections from the The Picture
(그림의 담론 : 그림에 대한 두 가지 선택)
이 연작은 ‘그림의 핵심을 이루는 담론’이라는 논제를 액자, 복장에서 찾아 제시한 작업이다. (This exhibition is the work of suggestion the theme of 'Core Discourse of Picture' in frame, costume.)
첫 번째 프로젝트 : 차이(Difference)
첫 번째 주제인 ˹‘차이’ 연작˼은 2004년 2월에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직관적으로 느낀 것을 재현하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 렘브란트, 들라크루아처럼 미술사에서 빛나는 작가들의 액자를 루브르 미술관에서 촬영한 것이다. 작품을 테두리지은 그 액자들에서 기술적 정교함과 예술적 엄격함을 느꼈다. ‘차이’라고 제명을 붙였는데, 액자의 의미는 액자의 안과 밖을 ‘분리하는 권력’이라고 생각하였다. 액자는 '파레르곤(parergon)'이라는 개념으로 데리다가 밝혔듯이, 작품 내부의 자체적인 ‘결핍’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액자는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모호한 불확정성의 경계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장식의 견고함과 화려함 때문에 마치 프랑스미학의 허구로 보였다. 반면에 미술관의 벽이나 복도 및 기타 시설물 모두 작품처럼 보였다. 루브르 미술관 전체가 예술작품으로 보여 졌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差延(Differance)’ 이 떠올랐다. 차연은 ‘다르다(differ)’는 개념뿐만 아니라 ‘지연(defer)’이라는 의미도 나타낸다. 두 가지 의미가 더해졌기 때문에 ‘다른 것’이 시간을 가지고 지속된다는 뜻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결정되어 있거나 확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작용은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에 하나의 대체 가능한 언어해석으로부터 다른 해석으로 지연된다는 데리다의 주장을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가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앙과 지방은 다른가? 라고 질문하면 ‘다르다’고 답변한다. 그런데 같은 질문을 5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물어 보았을 때도 ‘다르다’는 답변이 즉각적으로 나오기는 쉽지 않다. 동일한 질문일지라도 시간의 개념이 들어가면 의미는 확실히 정해지지 않으며 유일한 절대 가치는 부정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시기에 파리에서 렘브란트 작품을 보게 되었다. 작품보다는 액자에 눈길이 머물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금박액자의 장식이 유럽의 궁궐처럼 웅장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액자 안은 작품이고 액자 밖은 작품이 아니라고 분리시키는 액자의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액자의 의미를 ‘예술권력’으로 전환시켰다. 그래서 화면 가운데에 과장되게 위치시켰다. 액자는 예술권력이 되어 작품의 안과 밖을 가르는 힘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서구의 문화권력은 이런 차이와 분리시키는 힘에 의해서 모순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제목에서의 ‘차이’는 ‘차이가 있는 것에서 없는 것까지’를 뜻한다. 데리다처럼 차연이라고 하지 않아도 루브르의 액자들은 이미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차이’라고 제목을 정해도 내가 기술한 이 단어의 의미는 ‘차이가 있는 것에서 없는 것까지’를 뜻한다. 이 작업에 보이는 것처럼 작품의 안과 밖의 차이는 명확하지 않게 보인다. 액자는 작품 내부의 자체적인 ‘결핍’ 때문에 보충된 것 임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나누는 ‘힘’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과장된 장식으로 무장된 액자만 부각시켰다.
반면에 액자를 가운데로 위치시키고 작품과 액자와 벽을 삼등분 크기로 배치하여 프랑스 삼색기로 표현하기도 하고, 그림을 오히려 작품의 프레임에서 변방으로 배치시키고 액자들을 중심으로 재현하기도 하였다. 다른 작품에서는 액자 자체를 성상화로 보이게도 하였으며, 액자에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금지선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미술관의 금박액자들이 관람자의 시선을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포획하는지를 부각시켰다. 루브르궁의 미적권력은 이제 문화권력이 되어 그들과 우리는 ‘차이가 있는 것에서 없는 것까지’인데도 불구하고 즉, 차이가 없는데도 ‘차이’를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프린트는 이면화(Diptyque)로 하였다. 인화지를 다른 것으로 프린트하여 두 장을 붙여서 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사진은 여러 프린트 방식으로 보여 줄 수 있다. 그런데 인화지 다르면 그건 같은 작품일까 아니면 다른 작품일까? 아마도 같은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명확하지 않다.
두 번째 프로젝트 : 품질보증절대미(The Super High Deluxe Beauty)
두 번째 다룬 주제는 ˹'품질보증절대미’ 연작˼이다. 교황 레오 10세(Pope Leone X)는 제217대 교황(재위: 1513년-1521년)이다. 본명은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Giovanni di Lorenzo de' Medici)이다. 이 소재는 교황 레오 10세의 망토이다. 르네상스의 메디치 가문 출신이며 교황이었으니 그의 유품을 촬영하는 순간은 르네상스 미술의 핵심이자 원천의 빛과 마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망토 일부를 선택하여 ‘품질이 보장된 절대미’라고 제명을 정하였다. 르네상스 시기의 영광과 빛을 담았으니 ‘절대미’라고 해도 되지 않겠는가. 작품에 보이는 가늘고 희미하게 보이는 금실 자국은 서구역사에서 사라져 가는 기독교의 십자가처럼 보였다. 레오 10세의 망토를 하나의 물질로 재현하여 미니멀리즘의 ‘사물성’ 그 자체로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미니멀리즘이 표상하는 것은 사물의 원천이자 근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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