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전희경 - 바람이 구름을 걷어 버리듯展

[전시안내] 전희경 - 바람이 구름을 걷어 버리듯展

* 장소 : 신한갤러리 역삼(02-2151-7684)

* 기간 : 2018-01-22 ~ 2018-03-13

* 오프닝 : 2018-01-31 오후 18시

 

 


● 런치토크: 2018. 2.7 (수) / 2.21(수), 12:00
● 전시내용: 회화, 조각, 설치 등 30점 내외
● 관람안내 
-관람시간 : 월~토 10:00~18:00 (일요일 및 공휴일 휴관)
-관 람 료 : 무료
-사 이 트 : www.shinhangallery.co.kr

 

 

■ 신한갤러리 역삼 : 설립취지
신한갤러리는 국내 미술 저변을 확대하고 대중들에게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고자 신한은행이 설립한 비영리 전시공간으로 현재 광화문과 역삼 두 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특히 신한갤러리 역삼은 2011년 개관된 이래 “Shinhan Young Artist Festa”라는 신진작가 공모 프로그램을 통해서 젊은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더욱 고무함과 동시에 다채로운 기획전을 꾸준히 개최해옴으로써 미술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높이고자 매진하고 있다. 이 밖에도 런치토크나 현대미술강의 등 전시와 연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무료로 진행하여 관람객들과 함께, 그리고 작가와 함께 호흡하는 문화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 《바람이 구름을 걷어버리듯》展
바람이 구름을 걷어버리듯, 아주 평온하게 한 해가 가고 어김없이 또 새해가 찾아왔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의 반복이지만, 한 해의 새로운 출발선을 마주한 사람들은 새해의 희망찬 기운에 고무되어 으레 저마다의 소망과 목표들을 마음 속에 새긴다.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마음 속에 아로새긴 소망들은 모두 다르겠지만 각자가 꿈꾸는 안락한 미래이자 이상향에 닿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음은 똑같을 터, 그것은 아마도 현실의 삶이 버거울수록 더욱 간절하고 강렬할 것이다. 이렇듯 바라고 기원함으로써 위로 받고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은 누구도 본 적 없지만 누구나 꿈꾸는 세계, 유토피아(Utopia)를 만들어 낸다. 저마다의 유토피아에서 우리는 보다 더 완전무결한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상의 나라, 행복한 낙원의 세계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무대 위에서는 도무지 닿을 수 없는 곳처럼 늘 요원하게만 보인다. 닿을 수 없고 실재하지 않음으로 존재하는 이상의 세계는 원론적으로 허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현실과 꿈꾸는 이상 사이에서 괴로움을 느끼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이렇게 현실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각자의 이상향을 만들고 꿈을 꾸며 살아왔듯, 작가 전희경은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화가로서 고민하고, 회화로서 이루려 한다. 작가는 지난 2009년부터 지금까지 현실과 이상 사이에 발생하는 괴리감을 극복하려는 한 시도로서 이상향의 이미지를 담은 회화작업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초기 작품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전희경의 캔버스는 다채로운 색감을 바탕으로 보다 과감한 필치의 붓질과 물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화면을 더욱더 추상화 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듯 보인다. 거의 10여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축적된 전희경의 작품에서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바로 이러한 추이가 작가의 심리적인 변화에 기인하여 발생한다는 측면이다.
전희경은 크게 세 번의 시기에 걸쳐 자신의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대주제를 다루는 방식과 태도에 차이를 보인다. 가장 초기의 작업부터 살펴보자면, 이 시기 그녀는 처음으로 현실과 이상이라는 양극단의 세계 사이의 공간에 주목하며, 그곳에서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포착한다. 쉽게 도달할 수 없기에 좌절하지만 반대로 꿈꿀 수 있기에 견딜 수 있는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라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전희경 역시도 화가로서의 자신의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평가하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느꼈던 다소 막막하고, 혼란스럽고, 불안한 심정은 그녀의 붓 끝에 응축되어 캔버스에 고스란히 스며들었으며, 이 시기 제작되었던 ‘-살이’시리즈 등에서는 당시 방황하고 아파하던 그녀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후의 작업으로 나아감에 따라 전희경은 사이공간(in between) 에서 겪었던 내면의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생각하는 이상향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화면에 제시하는데 주력한다. 얼핏 동양 산수화의 모습을 닮은 이 시기의 작품들은 지난한 삶의 도피처로서 무릉도원과 같은 의미로 탄생된 그녀만의 유토피아다. 화면 속 요소들이 서로 뒤엉키고 흘러내리며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그녀의 유토피아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평온한 낙원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다. 하지만 이는 그녀가 살아온 지난 삶의 모습들이 오롯이 투영된 결과물이며, 초기작업의 연장선에서 현실을 거부하는 동시에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 그 자체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시기까지 전희경에게 ‘그림 그리기’란 자신이 생존하는 하나의 수단이자 방식으로 수행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캔버스는 최근의 작품들을 통해서 어느새 내면의 이상적 상태로 나아가려는 단계로 이행되었다. 특히 전희경은 이번 전시 《바람이 구름을 걷어버리듯》을 통해서 이러한 변화를 꾀하는 시도를 펼쳐 보이고 있다. 그간의 작품들이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혼란스러워 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는데 주력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흐트러짐 없이 이를 담담하게 직시하는 태도로 변모한 듯 하다. 특히 표현적으로는 앞서 언급했듯이 그간 보여주었던 유기적 형태의 자연요소를 더욱 추상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간 모습이다. 그녀의 화면은 이전보다 더 힘있고 역동적인 붓질로 가득 채워졌지만 여백의 효과 때문인지 한숨을 고르듯 오히려 여유롭고 차분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분위기의 변화는 작가 스스로가 생각하는 내면의 이상적 상태로 나아가려는 태도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인데, 최근에 전희경은 흐트러짐 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 ‘선정(禪定)’의 경지에 관심을 둔다. 선정은 불교의 근본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로 전희경이 그동안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이상향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 끝에 찾아낸 해답이다. 자신이 지금껏 몰두해 오던 문제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동안 작가의 이상향에 대한 관심도 어느덧 자연 그 자체로 옮겨지게 되었다. 존재 자체로 완벽한 자연의 모습은 가장 이상적인 상태이자 전희경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 경지(선정)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바람이 구름을 걷어버리듯’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면 물, 바람, 구름 등의 자연적 요소들이 시시각각 변하면서도 고유의 성질을 잃지 않고 순리대로 흘러가는 모습을 그대로 닮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에 자리한 근심과 잡념, 욕망이 바람에 씻겨 흘러가 듯 말끔히 걷히기 바라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들은 비단 전희경 개인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한 인간으로서 혹은 예술가로서 직면한 문제들은 하나같이 오늘날을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어김없이 새 해가 떠올랐다. 내 안의 결핍되고 이루지 못한 욕망들을 한데 모아 독려하고, 나만의 유토피아를 다시 세울 때이다. 더불어 필자 역시 작은 바람이 있다면 부디 이번 전시가 새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모두의 마음 속 구름을 걷어내고 새로운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되기를 바래본다.  

김지연(신한갤러리 역삼 큐레이터)

 


■ 《바람이 구름을 걷어버리듯》展 : 전 희 경
전희경의 작품은 곤고한 현실과 이상적 세계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지워내고자 고군분투하는 작가의 행위로서 이미지가 해체된 추상적 형태들과 색채의 흐름이 서로 중첩된 이질적인 공간들을 보여주며 그 차이를 지워간다. 이상에 닿기 위한 작가의 예술적 실천은 불가능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원동력으로 역할 한다. 전희경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갤러리 고도(2014), 백운갤러리(2016)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에트로 미술상(2015) 은상 및 겸재정선기념관에서 ‘내일의 작가’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 《바람이 구름을 걷어버리듯》展 부대프로그램 - 런치토크
신한갤러리 역삼은 관람객들이 보다 쉽고 재미있게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와 연계된 ‘런치 토크’ 프로그램을 무료로 진행한다. 낮 12시부터 1시간 동안 열리는 이 프로그램에서는 작가가 직접 전시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또한 갤러리에 있는 세미나실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작가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시간도 가져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때 작가들이 프로젝트 영상물도 준비해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런치 토크는 회사원, 주부, 대학생 등 일반인 20명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신한 갤러리 홈페이지를 통해서 접수 신청을 한 뒤 참가할 수 있다. 런치 토크 접수 안내는 전시 개최일에 홈페이지에 공지된다.

 

- 일시: 2월 7일 (수) 12:00 / 2월 21일 (수) 12:00 총 2회
- 장소: 신한 갤러리 내 세미나 실
- 참가비: 무료 / 선착순 25명, 사전예약자 우선 안내
- 문의 및 신청: www.shinhangallery.co.kr  02) 2151-7684 / 7678

* 자세한 일정 및 참여방법은 추후 홈페이지에 공지될 예정
* 프로그램은 총 2회 진행되며, 각 회차별 참여작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2014 김소원 비평
유토피아는 없다

 

- 청춘은 지금 방황 중.
청춘은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관대하기 어렵다.
살아있는 한 겪게 되는 자신과의 가장 큰 전투의 시기. -

 

상처받은 자의 유토피아
유토피아(Utopia)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다. 현세와의 연속선상에서 꾼 꿈이건, 시공을 단절한 양상이건, 결국 이상국(理想國), 도원경(桃源境), 하데스(Hades) 등은 현실 속에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꿈꾸고, 그곳에서 본능처럼 낙원을 떠올린다. 이상세계(理想世界)를 그린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의 소설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현실은 고단하지만 피안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행복할 꺼라 믿으며 많은 이들은 위안을 삼는다. 실재하진 않지만 현실에 원본(original)을 둔 허상(illusion)이며, 현실의 고통이 더할수록 선명해지는 이상(ideal), 유토피아. 분명 아이러니다.
역시 유토피아로 호명되는 한 세계가 있다. 전희경 작가의 2014 신작展에는 ‘유토피아’(Utopia in Emptiness_ 그 곳의 유토피아)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그러나 실상은 스스로의 내면에 오롯이 몰입 하고 있는 세계다. 그 결과가 행복한 유토피아의 이미지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이 내적 몰입 의 목적은 ‘심미적인 유토피아 이미지의 추구’나 ‘관람자 취향에의 봉사’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화면 속 요소들은 서로 뒤엉키고 뒤섞이고, 흐트러지고 흐른다. 묘사인지, 그저 붓질인지 그 경계 도 분명치 않을 만큼 엔트로피(entropy, 무질서도)가 최고조인 공간이다(《몽상도, 324 x 130 cm, acrylic on canvas, 2014》). 당연히 이곳에 타인이 노닐 곳은 없다. 환영하는 주인장의 손짓도, 몰래 불쑥 끼어들 틈도 보이지 않는다. 쉽사리 연상되는 평안한 유토피아와는 짐짓 다른 세계다.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뭉글뭉글한 덩어리들은, 그녀의 작업이 유토피아 세계와 짝지어 지도록 공헌해 온 요소다. 구름과 골짜기들을 닮은 이 유기체적 형상들은 작가의 분신, 즉 아바타 같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충분히 천국의 지형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붓 놀림, 색조, 배치 등 면면의 뉘앙스들을 짚어 볼 때, 우리는 이 올 오버 (all over) 페인팅이 결코 천국의 노래가 아님을 알 게 된다 (《생_ 몽상도, 96 x162 cm, acrylic on canvas, 2014》). 도리어 번뇌로 인해 터져나간 뇌의 파편들, 혹은 눈물로 꾸역꾸역 삼킨 온갖 잡동사니들의 배설물이나 토사물의 흔적이라는 통찰에 옳거니 손을 들게 된다. 분명 이곳은 친절한 만찬장(晩餐場)이 아닌 심란한 배설의 장에 가깝다. 전시타이틀 ‘Utopia in Emptiness’ 역시 유토피아가 ‘공허함’과 결합된 모순적 조합이다. 위안의 장소마저 염세적인 숨결로 덮어버린 흔적이다. 고통의 배설장이 되어버린 이 유토피아는 처연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작가의 머리 속엔 유토피아 따위는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장뇌’의 숭고함
입구도 출구도 없이 꽉 막힌 이 몸부림의 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날에 대한 그녀의 고백에 귀 기울여 보아야 한다. 순조로운 엘리트 코스로의 행보가 ‘화가로 성공하기’의 필수보증이 될 수 없다는 현실적 깨달음, 정작 작업에 몰두해야 할 시간의 대부분을 학비벌이에 쏟게 된 예비작가 시절의 자괴감, 그리고 내밀한 개인사에 얽힌 상실감 등이 그녀의 속을 검게 태웠다. 당시 작업들에 대해 그녀는 “괴물같이 변하고 의도치 않는 촉수가 자라나는 오브제들” 이었다고 회상한다. 자신이 매일매일 걸어가는 길이 궁극적인 목적지와 어긋나고 있다는 불안감이 카오스의 세계로 터져 나오기 시작. 배설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유토피아라고 부르고 있는 그 세계다.

2006년 첫 전시로 선보인 것들은 의외로 그림이 아닌 ‘오브제 조각(object sculpture)’들이었다. 긴 꼬리의 외눈박이, 촉수가 여럿 달린 얼룩이 등이 투명한 소품들을 지지대 삼아 함께 배치되었다(《Desire of Growing Stimuli Series, mixed media, 2006》). 그저 괴물이라 통칭하기엔 석연치 않은 이 오브제들은 아메바, 짚신벌레 등의 원생동물이나 히드라, 말미잘 등의 자포동물을 빼 닮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뇌가 없다는 점이다. 즉, 장이 뇌의 역할을 한다. 두뇌가 아닌 ‘장뇌’가 있는 셈인데, 진화론적으로 신경계가 처음 만들어진 곳이 두뇌가 아닌 ‘장’이라는 연구결과나, 두뇌가 멈춰도 숨이 멎지 않지만 장이 기능을 못하면 바로 숨이 끊어진다는 사실은, 이성만 숭배해온 우리의 오만함을 찌른다.

무엇보다, 그녀가 토해내듯 빚어내어 끈덕지게 붙들고 온 형상들이 바로 이 ‘장뇌생명체들’과 유사하다는 점은 놀랍다. 두뇌는 없고 단지 생사에 근본적으로 관여하는 ‘장뇌’만을 가진 생물들의 존재, 그런 생물을 닮은 형상들을 토해낸 무의식적 재현들, 그리고 애끓는 고통을 예술을 통해 이겨내 보려 한 그녀의 의지 사이의 묘한 일치는, 분명 놀라움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상처로 신음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지적 욕구를 채워 줄 책이 아닌 생명연장을 위한 처방이다. 실제로 번뇌가 극에 달했던 수년간, 이 형태들은 조각과 회화를 막론하고 그녀의 분신처럼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2011년 개인전에서 만나게 된 이 생명체들은 전보다 ‘사람다워진’ 모습으로 변모했으나, 여전히 몸체로만 생존하는 살덩어리 상태로 남아있다. 물론 머리는 없다. 독하리만큼 고통의 근원을 파고드는 이 같은 연속성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만다.

 

누구나 고통은 있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다. 단지 상대적 차이가 있을 뿐이며 중요한 것은 고통을 대하는 태도다. 퀴블러 로스(E. Kubler Ross, 1926~2004)는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를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의 5단계로 나누었다. 생물학적 죽음뿐만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정신적 충격들이 포함될 수 있다고 볼 때, 거의 10여 년에 달하는 전작가의 작업세계에서 우리는 위 단계들에 상응하는 양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부정 과 분노’의 과정은 현실거부와 외부의존적인 특징을 갖는데, 2008년까지 즐겨 사용한 촉수 달린 오브제들의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은 이 단계의 특징들과 부합된다. 한편, 그녀는 캔버스나 종이류가 아닌 인화용지나 합성피혁을 사용했을 만큼 선명한 발색을 원했는데, 색채와 형태간의 이율배반적인 이 배합은 주목을 끌 수 밖에 없다. 촉수 달린 기형적 생명체가 고통의 산물이라면 고채도의 화려한 색채는 이에 모순되는 어법이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발랄한 조증(躁症)은 우울증세 중 하나다. 화려한 색채로 치장한 고통의 이미지들은 현실거부를 위한 위장술의 한 양태로 볼 수 있다.

절대자에게 모든 힘을 의지하고 온순하게 행동하는 ‘타협’의 단계는, 주로 2011년 회화들의 배경(background)과 이미지간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배경과 이미지간의 관계성은 전작가의 심리적 변화와 맞물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 전 단계까지의 이미지들이 휑한 배경과 확연한 경계들을 지니고 있다면, 이 시기는 그 구분이 모호해진다. 배경의 일부처럼 보이는 암반형상들에 오브제들이 들러붙어 착생하는 ‘군락’의 형태들이 지배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타협’단계에 부합되는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특성은, 2011개인전(‘현실과 이상의 간극 또는 연옥’, 갤러리AG) 출품작들이 ‘살이’시리즈라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현실인정과 직시를 특징으로 하는 ‘우울’의 단계는, 우울의 정서를 직시한 2013년도 개인전(‘번뇌의 변태’, 오픈스페이스 배)이 드라마틱한 예시가 된다. 이때 미분화된 생명체가 아닌 인간형상이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여전히 머리는 없고 접힌 살덩어리가 강조된다. 무엇보다, 예민한 선과 흑백 톤이 강조될 수 밖에 없는 연필 드로잉을 전면에 내세운 전시였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음울한 흑백톤은 드로잉이 아닌 회화작품 《Practice being human》(2013)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녀의 작품들 가운데 이 정도로 많은 검정 톤이 할애된 회화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원색의 화려함으로 우울을 감추던 ‘조증의 위장술’과 달리 부조리한 삶에 대한 한숨을 감추지 않는 형식이 돋보인다. 그리고 2014 신작들에서 더 이상 조증을 연상시키는 색톤은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원색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새로 짓기 위해 흔들다.
2014 신작들은 실상 죽음의 ‘수용’의 단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준다. 신작들의 유기체들은 그 형태가 거의 해체되어 배경을 파고들거나 덮거나 흔들어대는 파괴적 양상을 띤다. 화면은 머지않아 폭발할 것처럼 무질서의 에너지가 고조되어 있다. 이는 새로운 질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실제로 신작 《연무도》(2014)와 《Moon Scene》(2014) 두 점은 정처 없던 부유에서 또박또박 보행으로의 변화를 뚜렷이 보여준다. 《연무도》에서 하얀 안개들은 막강한 힘으로 먼저 그려진 과거의 형상과 배경들을 덮는다. 마치 죽은 자의 유품을 흰 보로 씌워 삶과 죽음의 세계에 작별을 고하는 명백한 경계를 지우 듯 말이다. 《 Moon Scene》은 지금까지의 작업들과 확연히 다른 구도의 작품이다. 거의 대부분 올 오버 구성이던 작업들 가운데 처음으로 구심점으로서의 정원(正圓)을 그려 넣은 변화다. 마치 다음 목표지점을 알려주듯이 그 큰 원안에는 보다 실제적인 형태의 점묘산수가 그려져 있다. 지금까지의 유토피아가 혼돈과 배설의 장이었음을 직시하고 이제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려는 의지처럼 말이다.

고통의 여러 단계들을 내적으로 승화해 온 그녀는 하나의 주제를 향한 솔직 당당한 열정으로 수년에 걸친 이 방황의 지도들을 완성해 가고 있다. 그 시작은 상처를 치유하는 도피였다면 이제는 아픔을 직시하는 용기를 보게 된다. 멀리 떠나보면 집의 고마움을 알 듯, 현실에서 도망쳐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답이 나온다. 전희경의 유토피아는 그런 삶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여정이다. 방황과 아픔의 흔적들을 그대로 토해내고, 이상과 현실, 예술과 삶을 쉽사리 통합되지 못하고 갈등하는 것은 청춘의 시그널이자 결과적으로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수 있다. 모두 흔들어 헐고 나타날 그녀의 새집이 궁금해진다. 물론, 애증과 희망이 뒤섞인 곳, 지금까지 살았고 앞으로 살 바로 그 땅 위의 새집이다. 유토피아는 이제 필요 없다.

 


>> 2018 이성휘 비평
심적 공간으로서, 회화 (Painting, as a Space for Internal Mind)
이성휘(하이트 컬렉션 큐레이터)

 

전희경은 이상향이라고 하는 가상의 세계를 회화로 표현해왔다. 그곳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세계인만큼 시각적 묘사에는 현실 또는 자연이 적절히 투영되어 이뤄진다. 그간 그의 작업을 설명하는 데에는 이상향 외에도 무릉도원, 현실도피, 열망, 은신과 같은 단어가 빈번하게 쓰였다. 그의 작업은 시각적으로나 빈번히 쓰이는 어휘들로나 동양 산수화의 영향도 일면 감지된다. 이 글에서는 전희경의 회화를 현실과 이상의 사이 공간에 놓인 것으로 보고 그간 그의 회화가 어떤 제스처를 취해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공간
전희경은 지난 수년 동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열망하며 이상적 풍경을 회화로 그려왔다. 작가 스스로 밝히기를, “여기에는 현실의 팍팍함에 대한 도피의 감정도 섞여 있을 수 있고, 살아온 삶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라고도 한다. 또한, "산과 물, 구름과 안개, 폭포와 파도 등의 자연의 이미지를 가지고 색과 터치, 물감의 물성 등을 나만의 조형 요소로 표현했다. 또한 현실과 이상이라는 이분화된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공간을 주목하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 부유하는 우리와 그 풍경을 회화적 언어로 이야기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전희경이 이상향이라는 소재를 회화로 다룬 것은 최소 7년 이상 된 것으로 보이는데, 실재하는 장소나 공간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내면적인 공간을 캔버스에 투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적인 이유에서 작업으로 시작된 소재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상향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낙원이나 유토피아가 아닌 무릉도원을 언급한다. 무릉도원은 육조시대 사람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특징적인 것은 완벽한 세계를 추구하기보다는 혼란스러운 세계와 거리를 두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그림이 현실로부터 도피의 감정이 섞여 있다는 전희경의 설명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이상향이라는 가상 공간을 작가로서 스스로 창조해내려 하기보다는 인위적인 것에 매달리지 않고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무위자연의 태도로써 그리고 있다는 점도 포함된다.
  한편, 무릉도원이라고 하는 이상향(과 이상향에 대한 작가의 규정)은 그의 회화적 소재이기도 하지만, 캔버스 화면 내에서 구도나 형식적 구조로써도 중요하게 작동해왔다. 이 주제에 대한 초기작으로 보이는 《In Between>(2011)은 작가의 말에 의하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가상의 공간을 설정하고 시각적으로 풀어나가는 시도를 한" 작품이다. 70여 점의 작은 화면들이 모여 하나의 큰 화면을 구성하는 이 작품은 구체적인 공간을 묘사하지 않았지만 상단은 초록색, 하단에는 푸른색, 그리고 군데군데 흰색을 많이 사용하고, 폭포나 물줄기의 흐름과도 같은 중력이 감지되는 부분적인 묘사로 인해서, 공간적 배경이 산수풍경인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직접적인 묘사는 아니지만 산, 물, 구름 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그림의 상하가 중력의 힘을 받는 공간적인 상하와 일치하기 때문에 더더욱 산수화나 풍경화이 연상된다.
  그런데 전희경이 캔버스 위에서 다루는 공간은 정확히는 이상향이 아니라 이상과 현실 사이의 공간, 즉 중간적 공간이다. 앞서 언급한 《In Between>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무질서>(2015), 《심연>(2015), 《하얀 쓰나미>(2015), 《깊은 들숨>(2016) 등은 모두 제목에서나 작업 설명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의 중간적 공간(작가는 ‘제3의 공간’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을 상정한다. 그중에서 《혼란스러운 무질서>는 좀더 현실에 대한 작가의 감정과 생각을 묘사하는데 치중하고 있고, 《심연의 계단>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아 또는 욕망을 파고든 작업이다. 작가는 《혼란스러운 무질서>에서의 붓터치에 대해서 ‘부유하는 터치’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쓰고, 여타의 작업 설명에서도 부유라는 표현을 곧잘 쓰는데, 이때 ‘부유’는 심적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로써 필법으로도 연결되지만 화면상의 공간적 구도로써도 작용한다. 예컨대, 《심연의 계단>은 검정 바탕에 수 많은 필치로 구성된 작업이다. 기존의 다른 작업들처럼 폭포나 구름의 모티브로 추론할 수 있는 묘사가 있다. 특히 중력 방향으로 흐르는 물줄기 묘사가 곧잘 등장한다. 그런데 이 묘사들은 화면 상단에서부터 채워져 내려오고 정작 하단은 검정 바탕 위주로, 붓터치가 비워져 있는 편이다. 즉 땅을 딛지 못하고 붕 떠 있는 부유하는 상태가 화면 구도상으로도 묘사가 된 것이다. 따라서 심적 상태를 표현하는 어휘로써 부유는 개념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전희경의 회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도피와 유희 사이에서, 회화

  전희경은 자신의 회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공간, 공간을 만들고 그린다. 구체적 형상을 그려 넣지는 않지만, 심해와 같은, 협곡과 같은 모티브가 녹아있다. 나는 때로는 상상의 공간으로 도피하거나, 목적지로 삼거나, 위안하거나 한다. 그곳이 흔한 안식처가 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피안일 뿐이다. 펼쳐진 화면 안에서 나는 나의 붓질, 물감과 함께한다. 가끔은 나의 손에서 느껴지는 붓 한 자락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기도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펼쳐진 공간이 꼭 나의 인생 같기도 해서 그림을 계속 하고 있는 것 같다.” 평소 그림 안에 작가의 심적 상태가 얼마나 강하게 투영되는지 짐작케 하는 말이다. 그리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작가는 회화를 주로 도피와 위안의 장소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작들(2017년 작업들)에서 새로운 변화가 감지된다. 그간 도피처로서 이상향을 회화의 공간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이제 유희의 공간으로써 회화를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감지되는 변화다. 세로 길이가 4m에 다다르는 《이상적 풍경>(2017)은 더이상 어떠한 공간적 묘사를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화면은 좌우상하 뿐만 아니라 대각선 방향 등으로 자유롭게 쓱쓱 지나다닌 붓질로 채워져 있다. 헐렁하게 채워진 화면과 비교적 큰 붓질이 지닌 율동감도 인상적이다. 같은 제목의 또다른 작품(80호)인 《이상적 풍경>(2017) 역시 훨씬 즉흥적이며 추상적인 필치로 채워져 있다. 두 작품을 보는 동안 관람객의 시선은 산수풍경의 형상을 유추해보려고 하기보다 붓질과 그 궤적에 집중하게 된다. 화면 위를 지나간 작가의 팔과 움직임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작가가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이때부터 회화는 관념적 회화가 아니라 추상표현주의와도 같은 표현주의적 회화로 이행하게 된다. 전작들 중 《닿을 수 없는 무아>에서 소심하게 묘사한 수피춤은 《이상적 풍경>에 와서는 묘사가 아니라 액션이 된다. 그리고 진짜 무아는 수피춤을 추는 무희들처럼 붓질이 묘사가 아니라 액션이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액션이 유희로까지 확장되기를 바라는 편이다. 그것이 작가가 말하는 이상향에 한층 더 가까워지는 방법일 수도 있다.
  이 신작들에 대해서 작가 본인은 ‘추상적 풍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나는 작가가 ‘추상’을 언급하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변화를 느낀다. 추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간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내적 필연성에 대해서 집중해 왔다면 이제는 회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해서 좀더 신경을 쓸 것 같단 느낌을 받는다. 물감, 붓질, 표면과 움직임, 그리고 그로 인해 촉발되는 회화의 자율성. 문득 작년 여름, “모든 화가는 그 자신의 미술사를 만든다”고 했던 모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풀어 말하면, 회화는 이미 무구한 역사와 수많은 선인들에 의해서 더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어렵지만, 그 모든 회화의 시도와 역사가 고스란히 바로 내 그림의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니, 나는 나대로 무수한 시도와 시행착오를 통해서 내 그림의 역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즉 모든 화가는 똑같이 제로 상태에서 출발한다.
  아마도 화가에게 회화 평면은 평생 동안 심적 공간으로 존재할 것이다. 구체적 대상을 그리든, 마음의 심상을 그리든, 자신의 세계관을 직설하든, 화가 자신의 내적 충동에서 발화하는 이야기가 포함되며, 그가 겪는 변화와 함께 한다. 화가가 화면에 담는 이미지는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변화 뿐만 아니라 미술사에 대한 리액션도 포함된다. 호크니는 한 인터뷰에서 그린버그와 드 쿠닝의 일화를 언급한 적 있다. 그린버그가 “오늘날 더이상 얼굴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때 드 쿠닝은 “네, 그리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응수했다. 아이러니하지만, 당시 추상의 한계를 본 호크니는 드 쿠닝의 응수를 선호하였다. 나는 그린버그와 드 쿠닝의 일화가 추상과 구상의 의견 대결로도 읽힐 수 있지만, 드 쿠닝의 말을 ‘무엇을 그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회화는 이미지를 한정할 수 없다. 화가가 그리는 것, 그 자체가 회화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번 신작들에서 전희경이 ‘추상적 풍경’이라는 표현과 대조적으로, 산, 물, 폭포 등 구체적 대상을 제목에 지시한 그림들도 흥미롭다. 기존에 그려온 이상향의 범주에서 해석할 수 있는 그림들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전희경의 회화에서 ‘이상향’이나 ‘이상적’이라는 개념을 잠시 유보한다면 그의 그림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작가에게 달린 일이지만, 드 쿠닝의 말을 인용해, 그가 그리지 않은 그림들을 그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전시안내] 전희경 - 바람이 구름을 걷어 버리듯展

* 장소 : 신한갤러리 역삼(02-2151-7684)

* 기간 : 2018-01-22 ~ 2018-03-13

* 오프닝 : 2018-01-31 오후 1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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