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이서현 - 그녀의 지표展

[전시안내] 이서현 - 그녀의 지표展

* 장소 : 류가헌 2관(지하 1층)

* 기간 : 2024년 8월 27일(화) ~ 9월 8일(일)

* 오프닝 : 827() 오후 5

 

 

<이서현 _ 그녀의 지표> Lodestar #15, 30.75x41cm, Embroidery on Hanji, unique(AP1), 2022

 

 

 

당신과 나 사이, 균열을 잇는 누빔점

 

이서현 사진전 <그녀의 지표>, 827일부터 류가헌

 

 

어느 날, 친구들과 우이동 계곡에 있는 한 작은 수영장에 갔다. 시설은 엉성했지만 수면 위에 나뭇잎들이 떠 있는 숲속 수영장에서, 물 위의 이파리들처럼 팔랑이며 즐거워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그 수영장에 다시 갔다. 새 단장을 한 수영장은 낙엽 한 점 없이 깨끗했고, 그때의 관계들도 멀어지거나 사라졌다.

 

동일한 장소지만,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 사이에서 균열이 생겼다. 작가는 수영장의 물 위에 풀 한포기를, 하천에 나뭇잎 하나를 띄움으로써 그 균열에 관여한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과거의 한 요소를 가져다 현재에 잇댐으로써, 즉 기억의 요소를 개입시켜 눈 앞의 풍경을 바꾼다. 그리고는 사진으로 찍어 그 풍경을 안착시킨다.

 

이서현 <그녀의 지표> 작업이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이때 작가가 물 위에 띄운 나뭇잎은 일종의 누빔점이다. 천을 고정시키기 위해 소파쿠션를 누빌 때 쓰는 단추를 가르키는 누빔점은, 정신분석에서는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 등 경계를 잇는 헐거운 고정점의 의미로 쓰인다.

 

갈라진 벽의 틈새를 찍은 사진에 시침질을 해서 늘어뜨린 실, 하천물이 남긴 물자락을 찍은 사진의 포말들 사이 사이에 매단 구슬 같은 단추, 흰 벽면의 타일과 타일 틈마다 꽂은 핀침, 숱한 경계들을 찍은 사진들에 작가가 직접 바느질한 실과 단추들이 모두 그런 누빔점이다. 한지에 인화한 사진 위에 여러 다양한 오브제들을 덧댐으로써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사진의 평면성을 간단히 뛰어넘고 있는 것도 누빔점의 일부다.

 

이서현의 작업은 작가 스스로 인정하듯 타자의 균열, 과거와 현재 사이의 균열을 보여준다. 그 간극에 놓인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틈을 종횡한다. 외형적으론 어느 평범한 풍경이나 일상의 고요함을 옮긴 것으로 보이지만 작품마다 감정적 부조화가 이입되어 있고, 시간의 층위가 놓여 있다.” 라고 한 미술평론가 홍경한은, 이 작업이 궁극적으로는 자기치유 로 이어진다고 평하였다.

 

이서현 사진전 <그녀의 지표>2017<바람의 화원>, 2021<시간의 꽃>, <PERSONA>,  2022<현실거울등 일관되게 사회 속 타인과의 관계와 자신의 정체성을 탐문해 온 그간의 전시들에 연장선상에 있다.

 

전시는 827일부터 청운동 사진위주 류가헌 1관에서 열린다.

 

전시 문의 : 류가헌 02-720-2010

 

 

◎ 작가소개 : 이서현 SuHyun Lee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중앙대학교에서 사진학을 전공했다.

개인전으로 <바람의 화원, 공간 291, 2017>, <시간의 꽃팔레 드 서울, 2021>, <그녀의 지표  Similar Minded, Lodestar, 류가헌, 2024>를 개최했으며, <The Flower of Time, 수정갤러리, 2019>, <PERSONA, 공간 291, 2021>, <현실거울, 갤러리더씨, 2022>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출간 책으로는 <여행자의 인문학-사진 >(다산북스, 2016), <울림산방 가는 길>(동서문화사, 2018)이 있다.

 

 

◎ 작업노트

 

우리가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과 실제 그 대상 자체는 다른 것이라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니, “내면이 외면을 지시한다그 지시가 바로 지표이다. 지표는 접근할 수 없지만 다가갈 수 있고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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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너와 나의 경계

도시와 자연의 경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경험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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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지표는 나와 관계했던 사회적 실존과 현재 기억하는 나 사이의 균열에 대한 사진 작업이다. 표면적으론 나와 타자의 균열에서 비롯된 현재와 과거 사이 간극 같지만, 결국 미래로 나아가는 양가성을 가진다.

 

어떤 순서나 질서가 없는 상태는 세상 속 어떤 상황에서나 늘 존재한다. 개인의 결정이 순전히 주체성에서만 나오진 않는다. 문명은 가치판단을 유전자에 짙게 염색한다. 오늘날 문명의 현존은 현실 속 환영과 환영적 현실이 뒤엉킨 결과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주입된 유전자가 기억과 순조롭게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사회적 관계라는 렌즈를 거치며 쌓인 굴절된 경험이 현실에 매몰되지 않게 경종을 울린다.

 

단추는 이전 반짇고리 작품부터 추구했던 고유한 탐구대상이다. 현실과 심리를 반영했던 단추와 실을 지표 삼아 내외를 연결해보려 했다. 즉 단추와 실은 현실-의식과 비현실-무의식 등 경계를 고정시키는 누빔점이다. 단추는 실에서 시작되면서 자연스런 흐름을 만드는 쉼터이자 생각과 시선이 다시 단추라는 점에 머무르게 하려 했다.

 

매순간 균열은 발생한다. 그 순간을 되짚어보는 행위는 균열로부터 최소 한 발 정도는 빠져나오면서 균열된 상흔을 치유하려는 자취이다. 이 흔적이 그녀의 지표로 완벽히 봉합되었다고 규정할 순 없다. 이 작업의 순간을 담을 때마다 과거와 마주쳤다. 다음 시리즈는 세상의 살결이 나에게 신호를 보냄에 따라 미래의 나 자신이-이미 과거가 되었을-현재로부터 변화된 나를 관찰함으로써 성찰한 결과로 태어날 것이다.

 

 

◎ 평론의 글 

 

기억의 현재적 공존과 시간의 축적


관계적 사건 속 균열의 필연성

 

홍경한(미술평론가)

 

 

작가 이서현의 작업들은 대체로 단순한 구성,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요소의 결합을 특징으로 한다. 색은 중립적이며, 차분하고 명상적이다. 단추와 실, 핀 등의 오브제 등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선 사진의 평면성을 이탈한 실험성을 엿보게 한다. 특히 사진에서 흔히 사용하는 인화지가 아닌 한지의 사용은 매체확장성 측면에서 긍정적인 요소로 꼽힌다.

작품의 내용은 균열 및 관계와 밀접하다. 무언가가 갈라져 터짐은 얽히고설킨 관계로부터 비롯되고, 관계의 부정적 징후가 곧 균열이다. 작가는 이를 시간의 지층, 사회 속 안과 밖, 내안의 내외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균탁한 행간 사이사이에 새긴다.

작가는 균열 및 관계를 침묵으로 대응한다. 언어는 차갑고 감정적으론 무덤덤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금이 가고 벗겨진, 오랜 시간 속에서 녹청이 밴 벽의 질감과 대비를 이루는, 정렬된 흰색의 실이 인상적인 작품 <Lodestar #15>만 봐도 그렇다. 이 작업은 한지에 실이 자수의 형태로 들어서 있다. 나무와 벽, 오브제로 사용된 실에서 드러나듯 인공적인 요소와 자연적인 요소가 하나의 화면에 담겼다.

이 작업에선 세월의 흐름과 자연적인 변화가 한눈에 읽힌다. 한지라는 전통 소재와 자수를 결합하여 현대적인 미학과 전통을 융합하려는 작가의 의도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Lodestar #15>의 본질은 그것에 있지 않다. 겉으로는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 고정된 것과 유동하는 것 등이 앞서는 게 사실이나, 우린 그의 사진에서 어떤 원인에 의해 떼어지거나 탈각(脫殼)한 장면자체에 시선을 고정해야 맞다.

탈각은 곧 작가의 마음이다. 실은 그래도 붙잡으려는 가느다란 심정이다. 낡은 벽은 시간의 흔적이다. <Lodestar #15>에는 그러한 마음과 심정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작품 <Lodestar #08>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작품의 중앙에는 창문 형태의 거울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거울은 울창한 숲의 한 부분을 품었다. 밀림 같은 자연 속에 비-자연물이 또 다른 자연물을 내포한 형국이다.

이 작품은 언뜻 자연의 신비로움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괴테의 시와 소설을 자연물로 치환한 사진으로 연민과 슬픔, 비련과 사랑을 표현하려했던 예전의 <무제>(2016~) 시리즈 등처럼 자연에 얽힌 인간사라는 관점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Lordestar #08> 또한 ‘관계’와 관련이 깊다. 그도 그럴 것이 거울은 자연과 인간 세계를 잇는 매개체 역할을 하면서도 나와 나(화자와 화자), 나와 너(화자와 타자)의 연결을 의미한다. 때론 이상에 대한 의지와 혼자만의 의식화로서의 사물이기도 하다.

이를 플라톤(Platon)의 발언을 빌려 설명하면 ‘이데아 세계의 불완전한 반영’이자, ‘반사된 이미지를 통한 자아의 실체적 인식’(데카르트, Rene Descartes)이다. 그러한 거울이 (해당 장면을 찍을 당시 작가의 감정과 무관하지 않은)어두운 숲에 놓였다는 건 원만한 소통의 불가능성을 연상하는 건 당연하다. 어쩌면 작가가 처한 여러 사회 구조 내에서 스스로를 감시하고 규율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을 객체화하고, 사회적 시선에 부합하려는 압박과도 부합한다.(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말하고자 함 또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이리저리 아래로 흘러내린 실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그런데 필자는 이 작업에서 무엇보다 ‘거울과 나의 거리’에 눈길을 두었다. 거울은 단지 외부일 뿐이다. 속을 투사하진 못한다. 자아 인식,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거울을 실재와 허구를 구분하는 도구로 보았다. 그것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그 반영된 이미지는 실제와 동일하지 않은 일종의 시뮬라크라(simulacrum)이다. 이에 대해 작가 역시 “거울은 겉만 보일 뿐 내면을 담지 못했다. 겉과 속은 분리됐고 서로 다가갈 수 없다. 균열을 느꼈다. 거울을 보는 우리 모습의 현상과 같은 의미다.”라고 작가노트에 썼다.

이어 작가는 “자신을 반추할 때, 나를 통해 나를 본다. 타인의 시선은 그저 그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이미 타자와 관계를 경험하고 난 뒤 결과로서의 자신이다. 관찰자인 나는 몇 겹의 사회적 관계라는 렌즈를 거쳐 과거를 떠나버린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관계 속에서 얽히고설킨 ‘균열의 필연성’을 말한다.

‘균열의 필연성’을 거론한 문장은 인간의 자기 이해와 인식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타인의 반응과 시선을 통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것, 개인도 타인의 반영을 통해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 등에서 와 닿는 까닭이다.

필자는 여기서 관조를 본다. 관조는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는 행위다. 생각과 성찰은 시간과 사건(Time and Events)에서 비롯되고 사건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생한다. 이는 단순한 자기 관찰이 아니라, 외부의 요소들을 반영하고 통합하는 시간의 축적과 분산(the accumulation and dispersion of time)의 과정을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기 관조도 시간의 축적과 분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때문에 그의 근작들은 타인의 시선과 자신의 경험, 반응, 평가, 사회적 배경에 따른 자아 인식과 결부된다. 자아 인식이 고립된 개인의 몫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과정임을 시사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균열을 감수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균열의 필연성’이요, 그에게 예술은 관조인 셈이다.

참고로 ‘나-너’ 관계에서 자아가 타자를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고 주장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발언처럼 ‘나-그것’의 관계가 대상화를 의미한다면, 그의 작업에서 ‘나-너’의 관계는 상호인정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서현에게 상호인정과 관계의 상호성은 (진행 중인)고민이자 (아직)해결되지 못한 화두다. 그 화두가 화면마다 알알이 박힌 것들이 그의 근작이다.

작가는 실을 비롯해 단추, 핀과 같은 오브제를 자주 사용한다. 실은 흘러내리는 모습이 많고 단추와 핀은 어딘가에 안착되어 하나의 조형적 재료로 활용된다. 문득 그는 왜 이러한 재료들을 사용할까라는 궁금증이 인다. 추정컨대 앞서 언급한 관계의 문제도 있을 것이라 본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오래 전 작가는 단추나 실을 다루는 직업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적이 있다. 인터뷰 시 들은 내용으론 작가에겐 강렬한 기억으로,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을 법할 정도로 그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시기였다. <Lordestar #20>은 그 연장이다. 한지 위에 수없이 많은 핀을 꽂은 작업이다.

이 작품도 구성이 간결하다. <Lordestar #15>처럼 자연(작은 식물)과 그 배경이 되는 벽이 주체로 부각되어 있다. 미니멀리즘적인 여운이 일 만큼 시각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쓸쓸한 인상을 심어준다. 더구나 핀이 박힌 벽의 규칙적인 패턴과 소담하게 놓인, 어딘가 약간은 시든 듯한 식물로 인해 그 인상은 더욱 짙어진다.

통상적으로 식물은 생명과 성장을 상징한다. 비록 환경이 척박할지라도 식물은 그곳에서조차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이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생명이 존재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메시지와 등치를 이룬다. 하나 이서현 작업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 작업도 본질적으론 관계와 균열의 필연성, 인간 소외와 무관하지 않다. 타인의 시선이 우리 자신을 객체화하여 자아에 대한 불안을 야기할 수 있음을 반어적으로 묘사하고, 자아실현을 위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투쟁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을 경험하면서도,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의미와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주어가 배회한다. 실존과 무관하지 않은 대목이다.

조형적으로 눈여겨봐야할 것은 한지 위에 핀을 사용한 것이다. 핀의 규칙적인 배치는 벽의 패턴을 강화하며, 이로 인해 작품 전체에 구조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이는 자연과 인공의 상호작용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요소이면서 지난 기억의 현재적 투영과도 연결된다. 사진이라는 매체에, 작은 식물이라는 피사체를 통해 시간에 쌓인 경험의 잔상을 대상에 굴절시켜 현실에 이입시켰다는 게 옳다. 기억의 환류를 불러오는 장치다.

반복되는 과거와의 현재적 공존 차원에서 단추도 대동소이하다. <Time Flower>(2019~) 연작에서 익히 주요 소재로 사용된바 있는 이 오브제에 대해 작가는 “이전 반짇고리 작품부터 추구했던 고유한 탐구대상”이라고 했다. “내가 나에게 닿는 방법, 그래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닿는 방법을 반짇고리라는 오브제가 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렇게 보면 단추는 또 다른 오브제인 실과 더불어 무언가에 다가서기 위한 내적 심리를 반영하는 사물이다. 핀과 매한가지로 과거와 마주하는 매개인 것이다.

이서현의 작업은 작가 스스로 인정하듯 ‘나’와 ‘타자’의 균열, 과거와 현재 사이의 균열을 보여준다. 그 간극에 놓인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틈을 종횡한다. 외형적으론 어느 평범한 풍경이나 일상의 고요함을 옮긴 것으로 보이지만 작품마다 감정적 부조화가 이입되어 있고, 시간의 층위가 놓여 있다.(이 시간의 층위는 시계나 달력에 의해 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공간화된 시간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이자 경험적인 시간이며, 의식 속에서의 주관적인 시간인 ‘순수 지속(la durée)의 시간’(베르그손, Henri Bergson) 위에 걸쳐 있다. 이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기억의 시간’(The Time of Memory)과 유사한 개념으로, 사진이 가진 서사를 강화하는 침묵의 문장으로 함축된다.)

고독과 소외감을 증폭시키는 구도와 프레이밍, 사진의 분위기와 감정을 설정하는 빛과 그림자, 나지막한 서사를 시각적으로 풍부하게 만드는 여타 조형적 텍스처(texture)와 찰나의 순간을 섬세하게 짚어낸 조형적 디테일은 그 침묵의 문장을 생성하는 각각의 단어들이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단어로부터 (궁극적으론)자기치유가 나온다. 관람자들 또한 이서현의 사진이 선사하는 사유의 여백을 통해 낯설지 않은 상처들을 메운다.

한편 이서현의 작품에서 또 하나 거론해야할 부분은 실험적 태도다. 사진에 오브제를 이용한다는 건 익숙한 매체와의 변별을 갖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된다. 사진을 넘어 미술이라는 장르 간 교합을 위한 시도로 풀이할 수 있다. 이는 사진작가가 아니라 ‘작가’로서의 길에 유의미하다. 현대미술 속에서 사진이 지닌 매체의 특성을 통한 회화성의 확장과 사진이라는 장르를 이용한 미술적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남다른 의미부여가 유효하다.

그러나 동시대미술은 장르 간 학제 간 경계와 구분이 없다는 점에서 매체의 차이에 골몰하는 것은 낡음이다. 의미의 차이에 주안점을 둘 필요가 있다. 특히 개인적 내레이션을 넘어선(포함한) 통괄적 서사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미술과 사진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작품들이 아닌, 인간의 상상력에 기대야할 측면도 없지 않다. 다행히 <Lordestar #15>와 같은 작업에서 그 가능성을 엿본다.

이서현의 사진들은 지난 10여년 사이 많이 달라졌다. 의도와 표상의 불일치에서 서서히 벗어났고 자기 감상적 주제에서 이탈하여 보다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진입했다. 상대적 깊이감도 생겼다. 그래도 아직은 꾸준히 걸어야 한다. 명료한 방향을 위한 철학적, 미학적 탐구의 과정을 심화해야 하며, 조형적으로도 더욱 미술적이어야할 필요가 있다. 사진을 넘어 예술로서의 진화를 꿈꾸고 일기 같은 서술에 그칠 수 있는 내 안의 잠재의식에서 탈출하여 공명 가능한 당대성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 202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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