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시간의 여행자 ‘나라하라 잇코’, 떠나다

奈良原一高 (Ikko Narahara)Airstream Trailer in Moonlight, Utah, 1972, Gelatin silver print

 

 

 

시간의 여행자 나라하라 잇코’, 떠나다

 

일본의 현대사진을 연 대표적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인 나라하라 잇코(奈良原一高)가 지난 19, 향년 88세로 타계했다. 1956년 와세다(早稻田)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던 그는 첫 개인전 인간의 토지로 일약 각광을 받았다. 개인적인 시점을 통한 치밀한 구도로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영상미를 그려낸 그의 작품은 리얼리즘 사진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당시의 사진계에 큰 반향을 불렀다. 그 이후 인간의 토지(1956), 유럽-정지된 시간(1967), 재패네스크(1970), 왕국(1971), 소멸된 시간(1975), 초상의 풍경(1985), 베네치아의 밤(1985), 포킷 토오쿄오(1997) 등을 통해서 국내외에서 확고한 자리를 굳혀 나왔다.

 

나라하라와 나는 1986, 워커힐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나라하라 잇코 - 빛과 그림자』전을 계기로 특별한 인연을 맺어왔다. 『유럽 정지된 시간』과 미국의 『소멸된 시간』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시간그리고 빛과 어둠을 주제로 한 130점이 넘는 그의 대표작들로 구성된 초유의 대형 전시였다. 전시가 끝난 후, 그가 이 전시를 기획한 나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작품 가운데 어느 것이나 한 점을 선물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Airstream Trailer in Moonlight, Utah, 1972』를 가지겠다고 지목했다. 세계적인 그의 대표작으로서 알려진 『Two Garbage cans, Indian Village, New Mexico, 1972』를 선택하지 않은 나를 의외롭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떤 비밀스러운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그런 눈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도 가끔 그 작품을 꺼내볼 때마다, 나는 현실을 벗어난 이차원의 시공간으로 단숨에 슬립 해버리고 만다.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국내외에서 많은 사진전들을 기획해왔지만, 나라하라의 이 한 장은 나에게 있어서의 남다른 가치를 가진 소중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미국 땅을 밟아본 적이 없었지만, 내 머리 속에서는 그곳은 밝은 기회의 땅이었다. 그러나 일본 유학하던 70년대에 처음으로 접한 『소멸된 시간(Where Time Has Vanished), 1970-1974)』 시리즈의 미국은 결코 밝은 것이 아니었다. 아니, 거기에서는 밝은 대낮이지만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고, 시간은 정지되었거나 소멸되어가고 있었다. 유타와 아리조나, 캘리포니아, 뉴멕시코의 매마르고 광활한 대지와 눈부실 정도로 밝고 투명한 대기... 거기에 떠오르는 세계는 너무 밝아서 모든 시신경이 마비시켜버릴 듯한 착종된 감각. 마치 다른 혹성에 내던져진 사람의 눈에 들어오는 그런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아내인 요코와 함께 2년 동안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제작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Airstream Trailer …』은 유타주의 한 자동차 캠핑장에서 자정 가까운 시간에 촬영되었다. “공기는 차고 투명했고, 하늘에는 작은 구름조각들이 떠있었다. 짙푸른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과 구름이 빠른 속도로 캠핑 카 쪽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밝은 달빛이 캠핑카의 번들거리는 금속 표면 안으로 서서히 스며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노출이 충분하다고 여겨졌을 때 셔터를 풀었다. 몇 초였는지, 혹은 몇 십 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촬영은 단 한 장만으로 끝났고, 현상되어 나올 때까지 결과는 예측할 수 없었다.” 자택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미리 준비해놓은 프린트를 나에게 건네면서 한 그의 말이 귀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가 직접 만든 오리지널 은염 프린트는 더없이 아름답다. 빛이 금속 안으로 스며든다는 발상을 누가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한 장의 작품 속에는 나라하라의 빛과 시간에 대한 생각들이 높은 밀도로 농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다.

 

그의 죽음으로 20세기 사진에서 큰 별이 또 하나 사라졌다. 슬픈 마음으로 그를 보낸다.

 

 

글 : 김승곤 (사진평론가, 국립순천대학교 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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